- 공유 링크 만들기
- X
- 이메일
- 기타 앱
1. 시작하기 전에
이야기할 때, 듣는 사람이 거기에 감동하기 위한 조건으론 무엇이 있을까요? 이야기에 담긴 스토리의 재미도 중요하겠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듣는 사람이 그것을 기억하고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듣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재미가 없을 것이며, 반대로 진부하고 뻔한 이야기라도 이해가 잘 된다면 몰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해하기 위한 선행 조건으로는 듣는 사람이 들었던 이야기를 기억하고, 필요할 때 그 기억을 꺼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듣는 사람이 서사에서 전달하는 내용을 잘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심리학에서 말하는 기억 향상법을 바탕으로 알아보려 합니다.
![]() |
기억 과정을 나타낸 도표 기억과 인출 과정은 다른 글에서 자세히 다루었으니 이 글에선 다루지 않겠습니다. |
2. 묘사 : 이미지화 할 수 있게 전달
심리학에서는 추상적인 것보다는 구체적이고 시각화할 수 있는 것들을 더 잘 기억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소설 반지의 제왕을 예로 들면, 이 책의 저자 J.R.R 톨킨은, 사건을 서술하기 전에 배경이 되는 지역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먼저 묘사합니다. 이렇게 하면, 연기자가 연기를 시작하기 전에 무대를 먼저 보고 배경을 인지하는 것처럼, 독자가 사건의 배경이 되는 지역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물을 묘사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래의 두 문장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ㆍ로제라는 이름의 여자는 정원에서 잃어버린 반지를 찾고 있었다.
ㆍ금빛 머리칼에 빨간 머리띠를 두르고,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듯한 하얀 실크 원피스를 입은 로제라는 이름의 여자는, 자신의 머리띠 색을 닮은 장미가 만발한 정원에서 잃어버린 사파이어 반지를 찾고 있었다.
첫 번째 문장을 봤을 때, 우리는 머릿속에 어떤 명확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없습니다. 로제, 정원, 반지는 모두 이름만 존재할 뿐, 그들의 생김새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독자는 이 정보를 기억하지 못하거나, 이미지를 떠올리더라도 모든 독자가 서로 다른 것을 그립니다.
그러나 두 번째 문장에서, 우리는 붉은 장미가 만발한 정원에서 빨간 머리띠를 하고 하얀 실크 원피스를 입은 금발의 여인이 무언가를 열심히 찾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그녀의 눈길에 닿지 않는 어딘가에 햇빛을 받아 파란빛을 반짝거리는 사파이어 반지를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이제 독자들은 이 명확한 이미지를 갖게 되었으며, 우리의 뇌는 텍스트 자체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떠올렸던 이 이미지 하나를 기억합니다.
다만, 게임은 매체 특성상 고려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 매체는 서사를 텍스트보다는 영상과 게임플레이로 서사를 구성합니다. 따라서, 최대한 묘사를 텍스트가 아닌 영상과 게임플레이로 구성하고, 그럴 수 없는 상황에 텍스트 묘사를 사용해야 합니다.
바로 위에서 사용했던 로제에 대한 묘사를 예로 든다면, 붉은 장미가 만발한 정원의 묘사는, 플레이어가 정원에 막 들어섰을 때 붉은 정원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레벨을 구성하고, 로제에 대한 묘사는, 플레이어가 그녀 근처에 갔을 때 그녀의 외모를 하나하나 비춰주는 컷신을 재생하며, 그녀가 사파이어 반지를 찾는 행동은, 정원에 그녀를 NPC로써 배치할 때, 몸을 숙이고 바닥에서 무언가를 애타게 찾고 있듯이 배치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플레이어에게 바로 보여줄 수 없는 사파이어 반지에 대해 묘사를 할 때, 로제의 입을 빌려서 "푸르게 빛나는 사파이어가 박힌 반지를 잃어버렸다"라고 묘사함과 동시에, 반지의 이미지를 함께 보여준다면, 플레이어의 기억에 확실히 각인할 수 있습니다.
![]() |
블레이드 앤 소울의 남소유 소개 컷신 텍스트로 묘사하는 것 같은 감성으로 연출하여 이미지를 확실히 각인시켰습니다. |
마비노기의 대화 글뿐만이 아니라, 이미지를 함께 제시하여 기억에 더 잘 남도록 했습니다. |
3. 부호화 가이드 : 정보를 묶어서 제공
단기기억에 들어온 정보는 그곳에서 부호화되어 다음 단계로 넘어가며, 이것은 다음에 정보 인출의 단서가 됩니다. 즉, 플레이어가 서사에서 제공하는 정보를 쉽게 부호화할 수 있도록 가이드한다면, 그들이 서사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 작업을 위해서는, 우선 정보를 청크(덩어리) 단위로 묶어서 계층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상위 정보가 부호가 되어 기억하기 더 쉬워집니다.
이 작업을 가장 잘 활용하고 있는 것이 바로 모바일 수집형 RPG입니다. 대표적인 게임으로 두 가지, 세븐나이츠와 프린세스 커넥트를 살펴보겠습니다.
한국에 모바일 수집형 RPG 시대를 열었다고 볼 수 있는 세븐나이츠는, 영웅을 소속 그룹 단위로 나누어서 플레이어가 쉽게 영웅을 구분하여 기억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플레이어가 바로 루디를 떠올리지는 못하더라도, 세븐나이츠의 방패를 든 그 캐릭터라는 형태로 기억할 수가 있습니다. 세븐나이츠라는 상위 정보가 인출 단서가 되는 것이죠.
프린세스 커넥트 리다이브(이하 프리코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븐나이츠의 부호화 가이드가 강력하고 좋은 영웅 위주로 세분되어 있고, 그 외 영웅은 몰아서 편성되어 있었다면, 프리코네는 캐릭터를 3~5명 단위로 길드로 묶어서 각각의 고유하고 매력적인 이야기를 제공했습니다. 그리하여, 캐릭터를 기억할 때 개별 캐릭터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길드 단위로 기억하여, "페코린느가 미식전인데, 미식전은 세 명이었으니까, 나머지 두 명 누가 있었지?"라는 형태로 더 쉽게 기억을 인출할 수 있게 했습니다.
![]() |
세븐나이츠의 도감 무수히 많은 영웅을 소속 그룹 단위로 묶어서 기억하기 용이합니다. |
![]() |
프린세스 커넥트 리다이브의 길드 스토리 세븐나이츠와는 다르게, 3~5명 단위의 소규모 길드로 묶어 제공합니다. |
4. 깊은 처리 유도 : 정보가 담고 있는 본질을 안내
우리는 흔히 공부할 때는 답만 외워선 안 되며, 그 이유나 과정을 이해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이것은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며, 실제로 심리학에서 깊은 처리라고 하는, 의미상으로 이해하고 있을 때 더 쉽게 기억할 수 있는 현상입니다. 게임 내러티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기억했으면 하는 것을 이름만 언급한다면 플레이어가 기억하기 쉽지 않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한다면 더 쉽게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구체화할 수 있고, 이미지를 그릴 수 있으면 더 잘 기억한다는 2번 항목의 묘사에 대한 설명과 결을 함께 합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군단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ㆍ우리가 이번에 찾을 것은 카즈고로스의 망치라네.
ㆍ우리가 이번에 찾을 것은 카즈고로스의 망치라네. 티탄 카즈고로스가 그것으로 세계를 다듬었다고 하지.
위의 두 문장을 봤을 때, 플레이어는 카즈고로스의 망치라는 것에 대해서, 전자의 간단한 설명보다는 후자의 의미가 부여된 설명을 더 잘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개발을 하다 보면 텍스트의 길이를 줄이기 위해서 의미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단어 자체만 언급하는 경우가 많은데, 시나리오 기획자는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서사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며, 플레이어가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 인지하고, 그것에 맞게 의미까지 전달해야 하는 단어와 그렇지 않은 단어를 구분해야 할 것입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 군단의 카즈고로스의 망치 의미를 전달 여부에 따라 이것은 흔한 망치 중 하나로 기억을 스쳐갈 수도, 매우 중요하고 고유한 것으로 기억에 남을 수도 있습니다. |
5. 되뇌기 유도 : 자주 노출하기
심리학에서는 단기 기억이 장기 기억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되뇌기 및 분산 학습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즉, 기억했으면 하는 것은 플레이어에게 자주 노출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블리자드의 불타는 군단 확장팩 포스트모템을 인용하자면, 이 확장팩의 주역은 일리단 스톰레이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사에서 가끔 언급될 뿐 실제로 거의 등장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확장팩 내내 일리단의 존재는 잊혀질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블리자드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리치왕의 분노 확장팩에서는 퀘스트, 던전 곳곳에서 리치왕을 만날 수 있게 구성하였고, 이 덕분에 그의 존재감을 플레이어에게 각인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플레이어에게 노출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그들의 기억에서는 잊히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시나리오 기획자는 플레이어가 알아야 하는 내용을 잘 노출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 |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 리치왕의 분노 불타는 군단의 일리단과 달리, 리치왕은 퀘스트, 던전, 컷신 곳곳에서 등장했습니다. |
6. 자기 참조 효과 : 자신과 연관된 것이라 느끼게 하기
심리학에서는 우리가 자신과 관련된 것이면 더 잘 눈치채고 기억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어, 학교 수업 시간에 만약 선생님이 예를 들기 위해서 "철수를 예로 들어볼까?"라고 말한다면 철수 학생의 반응은 어떨까요? 그는 칵테일 효과로 인해 정신이 번쩍 들고는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 자신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여 수업에 집중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억했으면 하는 것을 말하기 전에 플레이어를 언급한다면, 그들은 이것이 자신과 연관된 것으로 생각하여 집중할 것입니다.
7. 자기 검증의 유도 : 되뇌기를 통해 장기 기억으로
자기 검증은 되뇌기를 유도하되, 학습자가 학습했던 내용을 인출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이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이야기하면 질문하라는 것으로, 게임에서 사용해볼 만한 방법으로 두 가지를 제시해보고자 합니다. 바로 선택지로 질문하기와 뜸 들이기입니다.
선택지로 질문하기는 대화 선택지 시스템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게임 내에서 대화를 진행하던 중, 플레이어가 기억했으면 하는 것을 언급할 때, 게임 세계 속 인물을 통해 플레이어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그다음, 플레이어에게 그것에 대한 몇 가지 선택지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 선택지가 어떤 유의미한 서사적 분기를 만들지는 않겠지만, 플레이어가 그 사실을 떠올리게 하는 데에는 충분합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이용하여 예를 들면, 게임 내러티브 세계 속 인물이 플레이어에게 "호드의 대족장이었던 그 벤시... 기억나나?"라고 물어본 뒤, 대화 선택지로 실바나스, 나타노스, 퓨트리스 세 가지 선택지를 제시합니다. 그럼 정답을 몰랐던 플레이어는 선택지를 보고 한 번쯤은 뇌 속을 탐험하여 기억을 꺼내기 위한 탐험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너무 잦은 대화 선택지의 등장은, 흐름을 끊고 시나리오를 보지 않는 플레이어에게는 그것 자체가 부정적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을 위한 자기 검증 방법이 필요한데, 이것의 대안이 바로 뜸 들이기입니다. 플레이어가 기억했으면 하는 것은 언급하기 전에, 게임 세계 속 인물이 대사로 뜸을 들이는 것입니다.
위에서 사용했던 대사로 다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게임 서사 세계 속 인물이 플레이어에게 "호드의 대족장이었던 그 벤시..."라고 이야기하고 대사를 끊습니다. 그럼 플레이어는 다음 대사로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 이 대사를 통해 그 벤시가 누구였는지 생각해볼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 참고 자료
1. 서적
ㆍ마이어스의 심리학 (데이비드 G.마이어스, 네이선 드월)
2. 게임
ㆍ블레이드 앤 소울 (NC 소프트)
ㆍ마비노기 (데브켓)
ㆍ세븐나이츠 (넷마블 넥서스)
ㆍ프린세스 커넥트 : 리다이브 (사이 게임즈)
ㆍ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ㆍ원신 (미호요)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