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프로젝트 세일러

파블로프식 조건형성과 기대감

1. 시작하기 전에

기대성(expectancy) : 연합이 예측 가능한 것일수록 조건 반응은 강력해진다.

심리학에는 위와 같은 흥미로운 이론이 있습니다. 여기서 연합이란 학습한 것(조건과 반응의 연합)을 의미하는데, 즉, 우리가 학습했던 것이 곧 발생하리라 예측할 수 있으면, 우리의 반응이 더 강력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기대성은 게임 외 콘텐츠에서는 이미 자주 사용하는 이론이며, 대표적인 예로, 공포 영화에서 공포를 자극하기 위해 귀신이 등장하기 전에 음산한 배경음악을 재생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 기대성 원리를 활용하고 있는 게임들을 살펴보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를 알아보겠습니다. 

영화 죠스
영화를 보지는 못했더라도, 죠스 등장을 예고하는 BGM을 아는 사람은 많을 것입니다.
BGM이 흘러나오면 우리는 "아, 안돼...."라며 긴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기대성 원리입니다.


2. 파블로프식 조건형성

  심리학에는 학습을 파블로프식 조건형성과 조작적 조건형성으로 구분하는데, 이 글에서는 파블로프식 조건형성에 관해서만 다룰 예정입니다. 그 이유는 학습 과정의 차이 때문입니다. 

파블로프식 조건형성은 자극과 자극을 연합시켜서 학습하는데, 쉽게 말하면, 학습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주변 환경에서 오는 자극에 대한 반응을 학습하는 것이죠. 가장 유명한 실험으로는 개와 종소리가 있습니다. 개에게 먹이를 줄 때 종소리를 함께 들려주면, 종소리가 들리면 먹이를 준다는 것을 학습하여 종소리만 들려도 침을 흘리게 된다는 실험입니다.

반면에 조작적 조건형성은 조작 행동과 결과를 연합하여 학습합니다. 학습자가 환경에 가한 어떤 행동이 가져오는 결과를 학습하는 것이죠. 예로, 뜨거운 주전자와 손을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팔팔 끓는 주전자에 손을 대면, 뜨거움에 손을 다쳐 다음부터는 손을 가져가지 않게 되는데, 이때 주전자에 손을 대는 행동이 바로 환경에 가한 행동입니다.

이처럼 조작적 조건형성에는 학습자의 행동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앞서 예를 들었던 공포 영화의 사례처럼, 기존 서사에서 기대성을 활용할 때는 학습자의 행동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물론 게임은 상호작용성이라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조작적 조건형성을 아예 활용할 수 없다고 할 순 없지만, 이것은 더 깊이 있게 다루어야 할 문제이므로 별도의 글에서 다루고, 이번에는 파블로프식 조건형성과 기대성에 관해서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파블로프식 조건형성 실험


3. 기존 게임에서 볼 수 있는 사례

  다행히도 이미 다양한 게임이 기대성 원리의 유용함을 깨닫고 활용한 바 있습니다. 활용 방안을 정리해보기 전에, 이 게임들은 어떤 형태로 이것을 활용했는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유형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였습니다.

가. 툼 레이더 : BGM을 통한 감정의 기대성 형성

  툼 레이더의 음악 감독 Alex Wilmer의 KGC 2013 강연 내용입니다. 이 게임의 목표 중 하나는 음악을 통해 플레이어의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감정의 소재를 특정 선율과 연합시키는 형태로 기대성 원리를 활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강연에서 언급했던 예로는, 라라 크로프트가 실종된 친구들에 대해 생각하여 플레이어가 감정 이입할 때마다 플루트를 들려주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럼 친구에 대한 걱정과 플루트가 파블로프식 조건형성으로 연합되며, 이후부터는 그녀가 걱정하기 전에 플룻 음색만 미리 들려주어도 플레이어가 앞으로 이입할 감정을 예측하여, 기대성 원리에 의해 효과가 극대화된다는 것입니다.

툼레이더 리부트
위 스크린샷에서 조금 더 진행하면 동료들의 보트를 발견합니다.
그래서 이 시점 즈음에 플루트 음색이 흘러나오기 시작합니다.


나. 마비노기 : BGM을 통한 인물의 기대성 형성

  이 게임은 거의 모든 NPC가 전용 테마곡을 가지고 있습니다. 플레이어는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반복적으로 NPC와 테마곡을 함께 접하여, 두 가지를 파블로프식 조건형성으로 학습합니다. 그리고 이 연합을 통하여 NPC가 등장할 때 테마곡을 먼저 재생해주는 형태로 기대성 원리를 활용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퀘스트에서 운명적 임무를 부여하는 인물은 대부분 모리안 여신인데, 이 여신이 등장할 때는 언제나 그녀를 보여주기 전에 그녀의 테마곡이 먼저 재생됩니다. 플레이어는 이 테마곡의 첫 마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운명적 임무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모리안 여신이 모습을 나타내면, 기대성 원리에 의해 임무에 대한 플레이어의 기대감은 한껏 고조됩니다.

마비노기 모리안 등장 컷신
모리안이 컷신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이전, 그녀의 테마곡이 먼저 재생됩니다.


다. 위쳐3 : 장소나 사물을 통한 감정의 기대성 형성

  이 게임에는 훌륭한 스토리가 매우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피의 남작 퀘스트입니다. 이 퀘스트에는 매우 섬세한 기대감 형성 요소가 있습니다. 퀘스트를 수행하다 보면, 남작이 항상 있던 자리가 아니라 정원에 나와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는 이 정원의 꽃이 실종된 그의 아내가 좋아했던 꽃이라고 언급하며, 또한, 옆 책상에는 아내나 딸이 썼던 편지가 놓여 있습니다. 즉, 정원이라는 장소 자체가 아내와 딸을 그리워하는 그의 심리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며, 플레이어는 정원이라는 장소와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연합해 학습하여, 남작을 만나려고 하는데 그가 정원에 있을 때면, 이윽고 그가 아내와 딸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 수 있어, 그리움 감정에 대한 기대감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4. 파블로프식 조건형성으로 내러티브 강화하기

  이제 앞선 사례를 참고하여, 향후에 어떻게 기대성 원리를 활용할 것인지 정리해볼까 합니다. 항목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해보았습니다.

가. BGM을 통한 기대감 형성

  소리를 먼저 들려주고 의도하는 자극을 제공합니다. 소리는 BGM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엠비언트 사운드가 될 수도 있는데, 이번에는 앞선 사례로 살펴봤던 BGM과의 연합을 세 가지로 정리해보았습니다.

1) 감정과 BGM 연합

  플레이어가 의도된 감정을 느끼기 전에, 그 감정과 연합하여 학습하게 할 BGM을 먼저 제공하여 학습을 유도합니다. 이렇게 하면, 감정을 촉발하는 무언가가 제공되기 전에 BGM을 통해 기대감을 먼저 형성하여, 향후 느끼는 감정이 더욱 강렬해집니다.
기대성 원리가 작동하려면 플레이어가 자극이 학습했던 것임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학습했던 자극에 큰 변화가 있어선 안 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핵심입니다. 예를 들어, 파블로프의 개의 실험에서, 어느 날 종소리를 북소리로 바꾼다면, 개는 더는 침을 흘리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로 음악을 변경해선 안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파이널 판타지 14의 경우, 이 게임은 확장팩마다 전투 음악이 편곡된 버전으로 변화하지만, 언제나 음악의 중심 멜로디는 유지했습니다. 이처럼 변화를 줄 때는 그것의 원본이 학습했던 것임을 인지할 수 있는 선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파이널 판타지 14
이 게임의 전투 BGM은 확장팩마다 편곡되어 변화합니다만,
언제나 그 음악이 기존의 전투 BGM임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2) 인물과 BGM 연합

  서사를 전달하려면 사건을 이끌 다양한 인물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실생활에서 만나는 사람도 모두 기억하기 힘든 플레이어가 생소하면서 상호작용도 부족한 게임 속 가상의 인물까지 모두 기억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이럴 때 인물을 위한 전용 BGM을 만들면, 그들을 기억하기 더 쉽게 하면서, 그들에 대한 집중이나 그들의 등장으로 인한 상황의 변화를 극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실생활에서 사람을 목소리로도 기억하듯, BGM을 통해 게임 속 인물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3) 상황과 BGM 연합

  어떤 상황을 강조하고 싶다면, 상황과 BGM을 연합하여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착신아리나 죠스와 같은 공포 영화에서 활용하는 BGM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다음 상황을 예측하게 하여 주의를 집중하게 한 뒤 상황을 터트리는 것입니다.
이때 차라리 빨리 상황이 벌어졌으면 싶거나 피하고 싶은 것, 즉, 결과가 즐겁든 무섭든 기대 심리를 유도하는 상황이어야 하는 것이 중요해 보입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 출근할 때마다 BGM을 재생한다면, 학습자는 BGM을 들었을 때 다음 상황을 기대하기보다는 오히려 현재 상황을 더 기피하려고 할 것입니다.


나. 장소를 통한 기대감 형성    

  장소와 감정을 함께 제시하여 학습시킨 뒤, 추후 장소를 목적지로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감정에 대한 기대감을 형성합니다. 플레이어가 목적지에 도착하여 그들이 예상했던 결과를 확인한 순간, 그들은 기획자가 의도했던 것보다 더 큰 감정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때, 장소는 감정을 전달하려는 주체와 서사적으로 유의미한 것일수록 효과가 강력해질 수 있습니다. 그저 인물이 바다를 보러 갔다고 해서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면, 그가 바다에서 연인과 작별을 했다거나 하는 에픽한 과거가 필요하며, 이 과거가 사전에 플레이어에게 전달되어 학습되어 있어야 합니다.


다. 그 외 모든 것

  소리와 장소만을 언급했다고 해서 파블로프식 조건형성과 기대성 원리가 여기에만 제한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감정과 연합할 자극으로 무엇을 썼는지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우리가 이 방법만 제대로 이해했다면, 무엇이라는 자극은 가능한 모든 것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영화 인셉션의 돌고 있는 팽이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이것은 특정 행동을 하고 있는 사물로 기대감을 유도한 사례입니다. 이 영화에서 멈추지 않고 도는 팽이는 꿈속 가짜 세상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이 등장하면 저곳이 꿈일지 현실일지에 대하여 기대를 합니다. 그리고 팽이가 점차 멈춰가는 속도에 맞춰서 기대감도 덩달아 커집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팽이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여주지 않아서 생긴 우리의 허탈감이나 여운은 이 기대성 원리에서 촉발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기대성 원리라는 것은 연출하기에 따라 무엇이든 활용할 수 있음을 인지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참고 자료
1. 영화
ㆍ죠스
ㆍ인셉션
ㆍ착신아리

2. 게임
ㆍ위쳐3 : 와일드 헌트 (CD 프로젝트 레드)
ㆍ마비노기 (데브켓)
ㆍ파이널 판타지 14 (스퀘어 에닉스)
ㆍ툼레이더 (Crystal Dynamics)

3. 강연
ㆍKGC2013 Alex Wilmer "툼레이더의 남다른 음악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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