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프로젝트 세일러

대화 구성법 : 집중 대화와 보조 대화

1. 시작하기 전에

  리니지2 레볼루션을 개발 및 서비스 하면서 받았던 피드백 중 인상 깊은 것이 있었는데, 일러스트와 큰 크기의 글씨로 된 일반 대화와 게임플레이 중 화면 옆에 작게 나오는 미니 대화를 비교하면, 많은 사람이 미니 대화가 더 몰입이 잘 된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저 자신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지요. 이 사실을 깨달을 때쯤, 한창 다양한 패키지 게임을 경험하고 있었는데, 이것들 역시, 일반 대화를 줄이고 미니 대화 방식을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미니 대화와 일반 대화의 차이가 무엇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으며, 게임은 현실을 가상으로 구현한 것이므로 그 답을 실생활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거기에서 어떤 답을 찾을 수 있었는데, 이 글은 그 답을 정리한 것입니다.

리니지2 레볼루션의 일반 대화(상)과 미니 대화(하)
단편적으로 보면 당연히 일반 대화가 더 몰입되리라 생각이 들지만,
실제로 플레이 경험을 비추어보면 정반대의 결과가 나옵니다.


2. 실생활에서의 대화

  우리가 실생활에서 가족, 친구와 하는 대화를 잘 생각해보면, 재미있게도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각각의 대화 형태에 집중 대화, 보조 대화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집중 대화는 예를 들면 "하던 것을 멈추고 내가 하는 말을 끝까지 들어!"식 대화입니다. 청자는 화자 또는 대화 상황으로 인해, 행동을 모두 멈추고 거기에만 집중해야 하는데, 이 강제성이 집중 대화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이 대화는 청자가 대화에 흥미가 있다면 전달력이 크게 올라가는 것이 장점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강제성에 대한 반발심으로 오히려 전달력이 터무니없이 떨어짐과 동시에 높은 스트레스까지 유발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직장에서 하는 회의를 생각할 수 있는데, 회의 참여자가 의지를 갖추고 집중하면 내용이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반면에, 의지가 없다면 귀를 닫아 버리고 내용을 하나도 듣지 않기도 합니다.

보조 대화"하던 일 계속하면서 들어봐"식 대화법으로, 대화가 보조적인 수단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강제성이 적다는 것이 특징이라서, 귀를 기울이는 것은 오로지 청자 몫이 됩니다. 이런 이유로 전달력이 떨어질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 대신 접근성이 좋다는 강력한 장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길을 걸으며 하는 친구와 하는 잡담이 있습니다. 화자와 청자의 목적은 길을 걸어 목적지로 가는 것이고, 대화는 그 과정이 지루하지 않게 하는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합니다. 가던 길을 멈추라며 강제하는 것이 아니므로 스트레스 없이 가볍게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흥미가 없다면 아예 듣지 않을 수도 있죠.

집중 대화의 대표적인 예 : 회의
회의 참여 외에 다른 행동이 엄격하게 제한됩니다.

이 두 가지 대화 중, 우리가 주로 사용하는 것은 보조 대화입니다. 우리는 일상 대부분을 보조 대화와 함께합니다. 밥을 먹으면서, 커피를 마시며, 출근 혹은 퇴근길 등 보조 대화를 하지 않는 순간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반면에, 집중 대화는 이것이 필요한 특별한 상황에서 사용합니다. 회사에서 하는 업무 회의, 친구의 고민 상담 등 단어 하나라도 놓쳐서는 안 돼서 집중해야만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만약 이 대화법이 서로 반대 상황에 쓰인다면 어떨까요?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그만 마시고 이야기를 들으라고 한다면? 심각한 주제를 이야기하는데, 상대방이 집중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하고 있다면? 그저 상상일 뿐인데도 우리는 두 상황 모두 스트레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상황에 맞는 대화법을 선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3. 현재의 문제 : 집중 대화 위주의 구성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게임 속 대화를 구성할 때는 이 사실을 간과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보통은, 많은 개발자가 강제성이 있어야 더 전달력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집중 대화만으로 대화를 구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일상 대부분은 보조 대화로 이루어짐에도 말이죠. 아래 두 가지 이미지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퀘스트 대화

엘리온(구 에어)의 퀘스트 대화

위 두 가지 대화법은 RPG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구성입니다. 게임 속 인물은 플레이어가 대화를 걸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이 대화를 거는 순간 엄청난 양의 글자를 쏟아냅니다. 그들의 과거, 현재 상황부터 시작해서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 말이 쉴새 없이 이어지는데, 그 와중에 플레이어는 다른 행동을 일절 할 수 없습니다. 이것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은, 이 구성이 집중 대화라는 것이며, 게임 속의 거의 모든 대화가 집중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언컨대 잘못된 것입니다. 게임은 게임플레이가 본질인 콘텐츠입니다. 그런데 집중 대화로 행동을 제약하기 시작하면, 게임을 즐기러 온 플레이어의 반발심은 일반적인 상황보다 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플레이어에게 스트레스를 유발할 뿐만이 아니라, 대화 전달력 역시 형편없을 이며, 게임 경험 역시 좋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4. 게임에서 올바른 보조 대화 활용 사례

  하지만 다행히, 게임이 발전을 거듭하면서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개선하는 게임이 생겼습니다. 이 게임들은 집중 대화를 줄이면서 보조 대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움직임을 보이며, 적재적소에 올바른 대화법을 활용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예시로 니어 : 오토마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게임의 퀘스트는 무선 통신으로 플레이어에게 전달하는 형태로, 플레이어는 행동을 통제받지 않고 하고 있던 것을 계속할 수 있는데, 이 특징을 보면 이것이 보조 대화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플레이어가 중요한 정보를 너무 많이 놓치지 않느냐는 우려가 제기되곤 합니다만, 모든 게임이 별도의 UI를 통해 플레이어에게 퀘스트 목표를 안내하고 있으며, 수십 년간 이어져 온 UX는, 퀘스트의 목표를 대화보다는 UI에서 확인하는 것 익숙하므로, 이 우려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또한, 이 게임은 인간관계의 변화를 위한 대화에 보조 대화를 적극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사람과 친분을 쌓는 대화는, 짧지만 자주 오고 가는 보조 대화에서 더 많이 발생합니다. 이 게임은 개발자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그 점을 잘 활용했습니다.

니어 : 오토마타의 퀘스트 전달
원거리 통신이라는 컨셉을 잘 살리면서, 보조 대화를 활용하여 전달했습니다.

또 다른 예로, 고스트 오브 쓰시마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게임 역시 보조 대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게임으로, 집중 대화에서 설명하기에는 자칫 너무 길어질 수 있는 인물의 과거 이야기를, 보조 대화를 활용하여 전달했습니다. 집중 대화에서는 퀘스트를 시작하기 위한 개연성만 간략하게 전달하고, 퀘스트를 수행하는 도중에 보조 대화로 인물의 과거를 전달하여, 스트레스를 줄이면서 퀘스트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긴 과정이 지루하지 않게 했습니다.

고스트 오브 쓰시마의 이시카와 선생 설화 속 보조 대화
이시카와 선생과 그를 배신한 제자, 토모에의 기나긴 과거를 설명하기 위해,
보조 대화를 적극적으로 사용했습니다.


5. 게임에서 올바른 집중 대화 활용 사례

  혹시나 이 글을 읽고 집중 대화는 나쁘고, 보조 대화가 좋다는 것으로 의도를 잘못 해석하신 분이 계시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제가 이 글을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것은, 게임 속 대화 역시 실생활 대화의 연장선이니, 상황에 맞는 대화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중 대화를 적용해야 하는데, 보조 대화를 적용한다면 무게감이 떨어져 오히려 몰입이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 집중 대화를 적용해야 하는 상황일까요? 쉽게 생각하면 흔히 말하는 엄근진(엄격, 근엄, 진지) 상황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보조 대화 사례를 살펴봤던 게임들의 집중 대화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니어 : 오토마타입니다. 아래 이미지는 이브라는 이름의 기계 생명체가 모종의 이유로 주인공 일행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장면입니다. 이 인물의 감정은 이 게임 내러티브의 주제와 최종 전투의 개연성을 관통하는 중요한 장면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플레이어가 반드시 집중해서 봐야 하며, 또한, 인물의 감정이 세밀하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이 장면은 보조 대화보다는 집중 대화로 구성하는 것이 옳습니다.

니어 : 오토마타의 집중 대화
만약 이 장면이 플레이어를 통제하지 않는 보조 대화였다면,
인물의 분노와 감성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음은 고스트 오브 쓰시마입니다. 아래는 어떤 인물에 대한 견해 때문에 주인공과 그의 동료 이시카와 선생이 갈등을 빚는 장면입니다. 이 갈등은 이 퀘스트 및 연계 퀘스트의 전체 주제를 관통하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놓치지 않는 것이 좋을 뿐만이 아니라, 그 주제에 대해 이 인물이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보조 대화보다는 집중 대화로 구성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고스트 오브 쓰시마의 이시카와 선생 설화 속 집중 대화
두 인물의 갈등을 보여주기 위해 집중 대화를 선택했습니다.

6. 마치며

  이처럼 집중 대화 혹은 보조 대화 어느 한쪽이 더 좋다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을 기준으로 생각했을 때의 상황과 기획적 의도에 맞게 대화법을 선택하여 적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각 대화에 어떤 대화법을 적용하는 것이 옳은지는 온전히 그것을 담당하는 기획자의 몫입니다. 대화를 구성하는 게임 내러티브 기획자는 자신이 작성한 대화가 그저 전달되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고, 그 대화가 실생활처럼 자연스러우면서 기획 의도에 맞게 잘 전달되고 있는지까지 신경 써야 할 것입니다.


※ 참고한 게임
1. 집중 대화 위주의 게임
ㆍ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ㆍ엘리온 (크래프톤)
ㆍ킹덤 하츠 3 (스퀘어 에닉스)

2. 대화법이 잘 배분된 게임
ㆍ니어:오토마타 (스퀘어 에닉스)
ㆍ고스트 오브 쓰시마 (서커 펀치 프로덕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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