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프로젝트 세일러

게임에서의 사건 표현

1. 시작하기 전에

  서사는 사건의 집합이므로, 그것이 어떤 이야기를 우리에게 해주었을 때, 우리는 그 사건(또는 그곳에 포함된 인물이나 사실 등)을 통해서 이야기를 이해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서사에서 사건을 잘 구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것을 콘텐츠 소비자에게 표현(혹은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전 개인적으로 사건을 잘 구성하는 것보다 잘 표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잘 구성된 서사가 재미없을 수도, 별것 아닌 흔한 서사가 감동적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건을 잘 전달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전통 서사 매체에서 사용한 것부터 살펴보고, 그다음에 그것을 어떻게 게임에 반영하면 좋을지, 게임에 잘 맞는 방법은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드래곤즈 크라운
사건의 표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 계기를 준 게임입니다.
이인칭 서술법의 독특한 게임 내러티브를 가진 게임인데,
후반부에 중요한 사건을 보여주지 않아서 많은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2. 전통 매체에서의 사건 표현

  전통 매체에서 사건을 표현하는 방법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사건을 매체에서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간접적으로 표현하거나 아예 표현하지 않고 숨기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사건을 어떻게 표현할지는 서사 연출자의 의도나 사건이 서사에서 하는 역할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건이 서사를 전개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면, 직접 표현하여 콘텐츠 소비자들에게 서사가 전개되고 있다는 감각을 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사건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하고 싶다면, 사건의 일부만을 보여줄 수도 있으며, 서사 세계를 구성하는 데 중요하지만, 현재 진행 중인 서사의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없으면, 사건 자체를 숨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매체별로 구체적인 예시를 들어 보겠습니다.


가. 소설에서의 표현 : 반지의 제왕

  먼저 소설 예제로는 J.R.R 톨킨의 유명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이 소설의 주제를 파악해야 합니다. 서사의 해석은 보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만, 저는 반지의 제왕은 반지 원정대의 인물들이 절대 악 사우론에 대항하며 겪는, 원정대원들의 성장 이야기로 보고 있습니다. 반지와 전쟁은 그를 위한 소재라고 볼 수 있지요.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살펴보겠습니다.

직접 표현 사건의 경우, 우리가 초점화(특정 인물의 시선으로 본다는 것)되어 볼 수 있는, 반지 원정대원들이 직접 겪는 사건들입니다. 주제가 원정대원들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므로, 그들과 관련된 사건은 최대한 자세히 설명해야 합니다. 사건을 예로 들면, 프로도가 반지를 얻게 되는 빌보의 생일잔치, 아라고른이 자신의 혈통을 받아들이고 왕위에 오르는 미나스 티리스 전투 등이 있습니다. 만약 빌보의 생일잔치를 간달프가 "반지는 빌보의 생일잔치에서 프로도에게 전해졌네"라고만 간접적으로 언급했다면 어떨까요? 아마 전달 과정에서 빌보가 힘겹게 반지를 놓는 장면, 프로도와 간달프의 두려움 등이 표현되지 않아서, 프로도가 짊어진 짐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에 대해 전달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간접 표현 사건의 경우, 직접 목격하지는 않지만, 각종 전달 수단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빌보가 반지를 얻게 된 경위를 프로도에게 설명해주는 부분, 아라고른이 늪지에서 프로도에게 해준 베렌과 루시엔의 전설이 있습니다. 이 사건들은 독자가 인물에게 초점화하여 목격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 의해 간접적으로 전달되고 있습니다. 주제와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이 사건들이 간접 표현으로 등장한 이유는, 복선을 제공하거나 주제를 보충해주기 때문입니다. 빌보가 반지를 얻게 된 경위는 향후 등장하게 될 골룸이라는 존재를 암시하며, 베렌과 루시엔의 전설은 아라고른과 아르웬의 관계를 대변하여, 아라고른의 심정을 나타냅니다.

마지막으로 숨겨진 사건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이 사건의 경우, 주제와 연관이 없어 콘텐츠 소비자에게는 표현되지는 않지만, 서사 세계의 근간을 이루면서 사건의 발단을 제공합니다. 위의 이유를 제외하더라도, 숨겨진 사건은 곁콘텐츠로 제공되어 콘텐츠 소비자의 더읽기 욕구를 충족하므로, 표현되지 않는다고 하여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 소설에서 숨겨진 사건은 사우론의 기원, 요정이 서쪽으로 떠나는 배경, 태양 제1~2시대의 이야기 등이 있습니다.

빌보의 생일파티
원정대(프로도, 간달프)에 의해 직접 목격되는 직접 표현 사건입니다.


나. 영화에서의 표현 : 해리포터

  이번에는 영화 해리포터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영화는 마법사 해리포터의 성장 이야기가 주제로, 그의 성장을 보여줄 도구로 볼드모트를 만들었습니다. 이 사실을 기반으로 직접, 간접, 숨겨진 사건을 알아보고, 특히, 영상 매체에선 소설과 어떤 부분에서 다르게 표현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직접 표현 사건은 영화의 주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으로, 해리포터의 호그와트 입학, 비밀의 방의 발견, 볼드모트의 부활 등이 있습니다. 소설에서는 사건을 초점화된 시선으로 지켜보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영상 매체에서는 카메라(화면)로 보고 있는 것으로 수단이 변화합니다.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주체가 카메라가 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지는 게임에서의 직접 표현을 언급할 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간접 표현 사건 역시 소설과 마찬가지로, 복선을 제공하거나 주제를 보충해주는 사건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아즈카반의 죄수에서 해리포터가 아버지를 배신한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깊은 분노를 하게 되는 사건이나, 시리우스 블랙의 탈옥과 해리포터로의 접근 과정을 신문이나 소문, 상황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하여, 그의 접근에 대한 서스펜스 재미를 유도한 것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숨겨진 사건입니다. 영화에서는 직, 간접적으로 알려주지 않았지만, 세계관의 근간을 이루는 내용을 찾아보면 됩니다. 예를 들면, 마법사들이 숨어 살게 된 배경, 호그와트 설립자들의 만남이나 설립 과정 등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해리포터 이야기의 근간과 개성을 만들어주는 기반 설정이지만, 해리포터의 성장과는 관련이 없어서 표현되지 않았습니다.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시리우스 블랙의 탈옥을 간접적으로 보여줬던 신문 장면입니다.
이 한 장면으로 관객들은 그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게 촉발됩니다.


3. 드래곤즈 크라운, 무엇이 문제였나

  이 글을 시작할 때, 드래곤즈 크라운의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이 게임은 무엇이 문제였기에 서사에 아쉬움을 느꼈는지 앞선 두 매체 사례를 바탕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이 게임의 경우, 이인칭 서술 방식을 사용해서 다소 몰입감이 떨어지는 면이 있었지만, 여기서는 사건의 표현 방식에 대해서만 다루겠습니다.

이 게임 서사의 주제는, 드래곤의 부활과 통제를 꿈꾸는 비밀결사에 이용당하는 비운의 왕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건의 구성을 봤을 때, 이 게임은 플레이어가 어떤 안타까운 감정을 느끼길 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주요 사건으로는 드래곤을 통제할 수 있는 유물, 드래곤즈 크라운을 찾아 떠났다가, 비밀결사에 붙잡혀 이용 당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국왕, 국왕이 실종되자 왕국의 통치권을 두고 벌어진, 왕국을 팔아넘기려는 재상과 지키려는 공주 및 공작의 정권 다툼, 왕국 부흥을 위해 비밀결사에 접근했다가 제물로 바쳐진 공작, 부활했으나 플레이어에 의해 처치되는 드래곤 정도가 있습니다.

문제는 너무 많은 사건이 숨겨졌거나 간접 표현되었다는 것입니다. 주제를 통해 안타까운 감정을 느끼려면, 플레이어가 왕국의 사정이나 선대 국왕, 공작의 고뇌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설정이 몰락해 가는 왕국이며, 그걸 드러내기 위한 사건으로는 재상과 공작의 정권 다툼을, 안타까운 감정을 극대화하기 위한 사건으로 비밀결사에 의해 제물로 바쳐진 공작 사건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서사 전달은 실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재상의 사건은 왕국이 몰락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지만, 그보다는 재상 개인의 욕심인 것처럼 표현되었으며, 제물로 바쳐진 공작은 그런 일이 있었다는 형태로 설명하는 간접 표현되어서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습니다.

제가 생각에는 드래곤즈 크라운은 게임 내러티브를 구성할 때 고려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를 간과했고, 그것 때문에 사건 표현과 서사 전달이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간과한 것, 그것은 바로 게임에서의 초점화 수단입니다.

드래곤즈 크라운에서 공작의 실종을 다룬 부분
가장 비중 있게 다루고 잘 전달해야 할 사건을 이렇게 표현하고 끝내버렸다.


4. 게임에서의 사건 표현 

  매체가 영화에서 게임으로 다시 한번 변화하자, 초점화 수단은 역시 변화하는데, 그것은 바로 게임플레이입니다. 소설에서는 초점화 대상을 글로 쓰인 것으로 접했고, 영화에서는 카메라를 통해 지켜봤다면, 게임에서는 게임플레이를 통해 상호작용하며, 직접 체험합니다. 

  간접 표현 사건이나, 숨겨진 사건 같은 경우에는 게임에서도 표현 방법이 크게 차이가 없어서 따로 언급할만한 것은 없습니다. 간단히 정의하자면 간접 표현 사건은 플레이어가 직접 상호작용 하지는 않지만, 코어 콘텐츠를 플레이하면서 은연중에 만나게 되는 것, 예를 들면 마을 주민의 일상 대화나 읽을거리, 게임 속 인물의 대화 속에 등장하는 사건들이며, 숨겨진 사건은 다른 매체처럼 플레이어에게는 알려주지 않는 사건입니다.

 반면에, 직접 표현 사건은 초점화 도구가 게임플레이가 되면서 큰 변화를 맞이합니다. 누구를 중심으로 잡든 상관없이 어떤 대상을 초점화하기만 하면 되었던 전과는 달리, 게임, 특히, RPG에서는 초점화 대상이 거의 항상 플레이어입니다. 또한, 게임플레이를 한다는 것은 플레이어가 게임에서 주어진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한다는 뜻을 포함합니다. 이 말은 즉, 모든 직접 표현 사건에 플레이어가 개입되어야 하며, 동시에 그들이 사건을 해결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두 국가 간의 전쟁이 벌어진 사건이 있다 하더라도, 플레이어가 직접 참전하지 않는다면, 그 사건은 게임에 적합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또한, 인물의 감정 변화를 전달하는 것 역시 단순히 대사나 컷신 영상으로만 표현했다면 옳은 방향이라고 할 수 없고, 퀘스트가 되었든, 대화 선택지가 되었든, 플레이어가 개입할 수 있는, 감정 변화의 주체가 되도록 구성해야만 게임에 적합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던전
직접 표현 사건이 게임에 맞게 만들어져야, 다양한 게임 콘텐츠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이때, 만약 플레이어 자신으로 초점화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건이라서 게임플레이를 구성하기 어렵다면, 그들을 다른 인물로 변화시키는 것도 고려해야 합니다. 위쳐 3를 예로 들면, 거의 사건을 주인공 게롤트로 초점화하여 진행하지만, 그의 딸 시리에 대한 몰입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시리 초점화, 즉, 플레이어 캐릭터를 변경하여 플레이할 수 있게 구성했습니다. 또한, 마비노기에서는 RP(Role-Playing) 던전이라는 시스템을 이용해, 내 캐릭터가 아닌 서사 세계 속 캐릭터를 조작하는 콘텐츠를 만들었습니다.

마비노기의 마우러스 RP 던전
마비노기는 플레이어 캐릭터 초점화로 알 수 없는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다른 캐릭터로 초점화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었습니다.


5. 드래곤즈 크라운, 어떻게 했어야 할까?

  그럼 드래곤즈 크라운은 사건을 어떻게 표현했어야 할까요?

몰락해가는 왕국의 경우, 재상이 나라를 팔아넘기려고 하는 것은 보편적인 클리셰로 봤을 때, 개인의 욕심으로 비칠 여지가 더 크며, 그것을 통해 왕국의 몰락을 보여주려면 왜 재상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까지 설명해야 하므로, 서사 구조가 너무 복잡해집니다. 따라서, 왕국의 몰락 그 자체를 일차적으로 보여줬어야 합니다. 타국의 침략이나 몬스터의 창궐로 고통받고 있는 마을을 구출하는 던전을 구성하고, 이렇게 된 원인이 왕국의 힘이 쇠퇴했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확실히 연결해야 합니다. 원래는 왕국군이 몬스터를 막아줬으나 그럴 여력이 되지 않는다거나, 타국이 감히 넘볼 수 없고 고개를 조아렸는데, 어느 순간 태도가 돌변했다는 형태도 괜찮습니다.

비밀결사에 의해 제물로 바쳐진 공작의 경우, 플레이어가 그 장면을 직접 목격했으나 막지 못했다는 형태로 구성하여, 직접 표현했어야 합니다. 추가로 이 과정에서 공작이 단순히 속은 것이 아니라, 몰락해가는 왕국을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희생해야만 한다는 형태로 플레이어의 도움을 거절한다면, 그의 선택이 더 안타깝게 보였을 것입니다.

위쳐3의 노비그라드 검문소
검문소 앞을 가득 메운 피난민과 그들의 진입을 막는 병사들
별도 설명 없이 이 환경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이 왕국이 혼란스러운지 알 수 있습니다.
드래곤즈 크라운이 혼란한 왕국을 보여주려면 이렇게 일차적으로 보여줬어야 합니다.

댓글

  1. 드디어 또 계시하고 계셨군요! 이번에 '디스코 엘리시움'과 '오웰' 등 서사에 대해 설명하기 좋은작품들이 많이 나왔어요. 혹여 대중문화, 문화산업 등등의 서적을 추천해주시는 컨텐츠도 오시면 정말 좋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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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제 메일로 포스팅 'dreamrugi game lab'이라고 와서 어딘가 했더니 ,여기였고 아직 여기 블로그 방식 포스팅에 적응하시는 것 같아서 디자인 폼이 아직 조정이 안된 것 같네요 ㅎㅎ. 내용이 건실하시니 폼자체는 차차 조정하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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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그리고 마지막에 이용하신 게임이나 참고한 서적이나 참고 자료 같은 남겨 주신다면 칼럼으로서 공신력도 생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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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디스코 엘리시움이 유명한 것 같긴 하더군요 ㅎㅎ 조만간 해봐야 겠네요 :-)
      디자인 폼은 구글 블로거는 웹 코딩을 할 줄 알아야 되더라구요ㅠ 진입장벽이... OTL
      좋은 의견 많이 제안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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