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프로젝트 세일러

곁콘텐츠 : 게임 내러티브의 꽃

1. 시작하기 전에

  서사학 강의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바로 곁텍스트였습니다. 게임을 하면서 은연중에 중요하다고 느끼고 있었지만, 명확히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개념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개념이 명확히 잡히고 난 뒤로는, 장르를 불문하고 게임에서 활용할 수 있는 모든 내러티브 수단 중에서도, 곁텍스트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부터 곁텍스트, 나아가 곁콘텐츠로 부르게 될 개념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이것이 왜 게임에서 중요한지 알아보겠습니다.


2. 곁텍스트, 곁콘텐츠란?

  곁텍스트(paratext)는 서사학에서 나오는 개념으로, 서사 경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곁가지처럼 뻗어 있는 모든 자료를 말합니다. 이것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서사 세계를 확장(더읽기의 영역)한다는 것입니다. 서사에는 주제가 있으므로, 방대한 세계관을 만들어도 전달할 수 있는 내용은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독자는 세계를 더 자세히 알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작가는 본 콘텐츠에서 미처 알려줄 수 없었던 것을 곁텍스트로 제공했습니다.

과거에는 곁텍스트를 글이나 그림으로 제작했지만, 시대가 흐르자 형태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책에서는 부록이나 번외편으로 만들어졌던 것이, 영화로 넘어오자 포스터, 공식 설정집, 공식 홈페이지의 각종 콘텐츠로 변했습니다. 또한, 인터넷이 발전하고 소비자 간의 교류가 활발해지자, 어떤 곁콘텐츠는 소비자에 의해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소비자들이 만드는 위키나 영상 콘텐츠를 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지금은 곁의 범위가 넓어졌으니, 글이 아닌 모든 콘텐츠라는 의미를 담아, 곁콘텐츠(paracontents)라고 불러야 합니다.

애니메이션 바이올렛 에버가든의 공식 설정집 샘플
우리는 곁콘텐츠를 통해 매료된 세계에 대해 더 알고자 하는 욕구를 해소합니다.


3. 곁콘텐츠와 게임

  글을 시작할 때, 곁콘텐츠는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내러티브 수단이라고 하였는데, 이제 그 이유를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게임을 즐기는 유저는 독자나 시청자가 아닌 플레이어이므로, 그들의 유형에 빗대어 보면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스토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플레이어입니다. 보통, 그들은 게임의 메인 스토리 콘텐츠에 만족하지 않고, 게임 속 서사 세계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 합니다. 기존 매체라면 그들을 위해 부록이나 설정집 같은 곁콘텐츠를 제공했겠지만, 게임은 거의 모든 곁콘텐츠를 게임 속 콘텐츠로 구성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예를 들면, 괴물 사냥꾼이 등장하는 게임, 위쳐의 경우, 게임의 주된 이야기는 주인공이 딸을 찾는 내용입니다만, 늑대인간에게 납치된 여성을 찾는 이야기를 서브 퀘스트로 구성하여, 현재 이 세계가 괴물로 인해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알려주면서, 늑대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하면, 기획자 입장에서는 자신이 만든 세계를 더 많이 알려줄 수 있어서 좋고,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게임에서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늘어나는 것뿐만이 아니라, 더읽기 요소까지 얻을 수 있어서 서사 세계에 더 깊이 몰입할 수 있습니다.

위쳐3의 괴물 도감 속 늑대인간
서브 퀘스트를 수행하여 도감 속 내용을 획득합니다.
도감은 비유하자면 게임 속 설정집과 같습니다.

두 번째는 스토리에 관심이 없는 플레이어입니다. 이들에게 서사 콘텐츠는 보상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만약 최소한의 성취감이라도 주어지지 않는다면 콘텐츠를 하는 것 자체를 포기하기까지 합니다. 기획자가 제아무리 공을 들여 콘텐츠를 만들어도, 정작 그것을 소비해야 하는 플레이어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만드는 의미가 없습니다.

다행히 곁콘텐츠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곁콘텐츠를 통해 서사를 간접적으로 전달하면, 가랑비에 옷 젖듯이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조금씩 전달한 서사들이 모이고 모이면, 스토리에 관심이 없던 플레이어도 호기심이 촉발되어 게임 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몰입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프롬 소프트웨어의 다크소울 시리즈의 경우, 아이템의 플레이버 텍스트를 통해 스토리를 간접적으로 전달하여 호기심을 자극하는 스토리텔링으로 유명합니다. 이 방법은 장비를 바꾸거나 강화할 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플레이버 텍스트를 흘깃흘깃 보게 만들고, 이것이 끊임없이 반복되어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스토리에 관심을 가지도록 만듭니다.

다크소울의 아이템 설명
게임 내에서 텍스트가 노출되는 곳이면 무엇이든 곁콘텐츠가 될 수 있습니다.


4. 더 많은 타게임 사례

정리하면, 곁콘텐츠는 스토리에 관심이 있거나 없는 플레이어 모두를 위한 최적의 스토리텔링 기법이라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곁콘텐츠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게임 내러티브를 강화한 게임들을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가. 갓 오브 워 4

  북유럽 신화를 기반으로 한 이 게임은, 신화에 대한 플레이어의 이해도에 따라서 서사의 재미가 크게 좌우됩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게임의 곁콘텐츠는 북유럽 신화의 내용을 전달하는 것을 중대 목표로 삼았습니다. 주목할만한 곁콘텐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우선 많은 게임에서 사용하고 있는 수집형 업적 콘텐츠입니다. 성소 지식은 레벨 곳곳에 숨겨진 벽화 형태의 오브젝트로, 업적 달성이라는 동기 부여를 통해 플레이어가 접근하도록 유도한 뒤, 북유럽 신화의 주요 사건을 전달합니다. 개연성 역시, 거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도중, 그들이 남겨 놓은 기록을 발견한다는 형태로 풀어서, 서사적 일관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다음은 이른바 엿듣기입니다. 게임을 진행하다 보면 미미르라는 자와 동행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주인공의 아들이 질문하고 그가 대답해주는 식으로 북유럽 신들의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미미르는 실제로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대단한 지식을 보유한 현자인데, 이것을 차용해 세계관과의 개연성을 확보한 것 또한 눈여겨볼 점입니다. 

갓 오브 워4의 성소 지식
수집형 업적 콘텐츠로 성취감을 제공하는 동시에, 북유럽 신화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나. 디아블로 3

  일지나 명령서와 같은 형태를 활용하여 퀘스트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인물의 내적 심리를 전달하거나, 게임 속 지역이나 악마의 이야기를 전달하기도 하며, 플레이어의 시점으로는 알 수 없는 적의 이야기도 전달합니다. 중요한 것은 플레이어의 시점으로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전달했다는 것입니다. 소설이나 영화와 달리 게임, 특히 RPG는, 시점이 플레이어 캐릭터 일인칭으로 고정할 수밖에 없어서 인물의 내면이나 시점 외 이야기를 전달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디아블로 3는 이 문제를 일지나 명령서 형태의 곁콘텐츠로 기발하게 해결해낸 것입니다.

디아블로3의 레아의 소지품
플레이어 시점으로는 알 수 없는 레아의 내적 심리를 그녀의 일기장을 통해 전달합니다.


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곁콘텐츠의 향연이라고 할 수 있는 게임입니다. 오픈월드형 MMORPG라는 장르적 특성에 맞게, 사용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곁콘텐츠로 필드를 가득 채워, 서사 세계를 끝없이 확장하고 있습니다. 이전 게임들에서 언급되었던 것들을 제외하고, 눈여겨볼 만한 것 하나만 살펴보겠습니다.

바로 NPC를 활용한 대화 연출입니다. 이 방식은 블리자드식 스토리텔링에서 가장 호평받는 것 중 하나로, NPC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은연중에 서사를 전달합니다. 앞서 갓 오브 워 4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은 엿듣기의 일종이지만, 노골적이면서 적극적으로 알려줬던 그 게임과 다르게,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일상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우연한 장면으로 구성합니다. 마치 현실 세계에서 길을 걷다가 주변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는 것만으로도 그 장소의 분위기를 알 수 있는 것처럼, 그 환경에 있는 것만으로 엿듣기를 통해 은연중에 서사를 알게 하는 것이죠.

예를 들면, 판다리아의 안개 확장팩 당시, 오그리마 공성전 직전의 듀로타를 들 수 있습니다. 당시 확장팩은 가로쉬의 종족 차별 정책으로 오크가 아닌 호드에 대한 차별이 심하다는 서사를 전개하고 있었는데, 이를 전달하기 위해 곳곳에 오크들이 다른 종족을 차별하거나 억압하는 연출을 구성했습니다. 그리고 오그리마 인근 마을에서는 공성전을 준비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볼진과 바인을 볼 수도 있었습니다. 강제성이 없는 이런 연출들을 플레이어들은 가볍게 스쳐 지나가지만, 이것을 반복하여 보게 됨으로써, 가랑비에 옷 젖듯이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서사 세계에 빠져들게 됩니다.
또한, 이 연출을 앞으로 진행할 이야기나 유명한 과거 이야기에 대한 이스터에그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두 가지 예를 소개하자면, 전자의 경우, 격전의 아제로스 확장팩에서 바닷속 곳곳에 숨겨진 토르톨란의 마을에 가보면, NPC들이 현재 해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대화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다음 업데이트인 나즈자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후자의 경우, 옛 언덕마루 구릉지 던전의 여관 건물 안을 살펴보면, 전설적인 검 파멸의 인도자가 탄생하는 과거의 장면을 직접 목격할 수 있습니다.

오그리마 공성전 당시, 볼진과 바인의 대화 연출
공성전에 대한 둘의 내적 심리를 알 수 있었습니다.


파멸의 인도자가 탄생하는 순간을 연출한 대화 연출
유명한 검의 탄생 순간을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볼 수 있습니다.


5. 마치며
  이번 글에서는 곁콘텐츠에 사례로 서브 퀘스트, 수집형 콘텐츠, 대화 연출을 살펴보았습니다만, 이미 나와 있는 다른 게임들에 정말 각양각색의 곁콘텐츠가 있습니다. 심지어 곁콘텐츠가 시대의 흐름에 맞춰서 변화하기도 하는데, 최근 일본향 RPG의 경우는 스마트폰을 통해 캐릭터와 대화를 주고받기도 하거나, 캐릭터가 올린 SNS 글에 댓글이 달리는 형태로 곁콘텐츠를 구성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게임에서 곁콘텐츠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면서도 아직 발전할 여지가 많은 부분입니다. 게임 시나리오 기획자는, 나아가 게임 내러티브 기획자는 게임의 메인 스토리를 풀어내는 것을 고민하는 것에서 멈춰서는 안 되며, 게임의 서사 세계를 확장할 수 있는 곁콘텐츠가 무엇이 있는지 파악하고, 나아가 원하는 곁콘텐츠가 있다면 제안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엘더스크롤 5의 곁콘텐츠, 책과 아이돌 마스터의 곁콘텐츠, 아이돌의 블로그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곁콘텐츠도 거기에 맞게 형태가 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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