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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하기 전에
시나리오에 신경 쓴 많은 게임을 하면서, 제가 개발에 참여했던 리니지2 레볼루션과 비교하면 이 게임들은 대사를 읽는 재미가 월등히 더 좋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느낌은 단순히 내용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고, 무엇이 차이인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또한, 소설, 영화, 애니메이션, 드라마를 보면서, 게임이 여러 가지 이유로 이들에 비해 많은 부분에서 뒤떨어지지만, 게임은 이들이 주지 못하는 어떤 특별한 재미를 준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 두 가지 의문에는 어떤 연결 고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글은 다른 매체는 가지지 못한 게임만의 장점을 찾으면서, 그것이 게임에 어떤 재미를 부여해주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 게임 이전의 매체
게임 이전 매체의 공통점은 일방향성이라는 것으로, 매체는 정보를 전달하고 우리는 받아들이기만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전 매체들은 그동안의 발전 방향이 어떻게 하면 정보를 더 재미있게 전달할 수 있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책은 삽화를 첨부하거나, 실감 나는 묘사, 수사학 같은 것을, 영화는 좋은 화질, 화려한 연출, 실감 나는 그래픽, 감정이입 되는 연기를 발전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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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매체는 모두 정보 전달 방법 개선 위주로 발전을 해왔습니다. |
3. 게임의 한계
게임에서 시나리오가 중요해지기 시작한 뒤로는, 이것 역시 다양한 방법으로 이야기 전달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게임의 역사가 30년 이상이 지났지만, 게임 속 서사가 주목 받은 사례는 드물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서사가 매력적이지 않았을까요? 게임의 주목적이 서사가 아니라 게임 플레이라는 것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많은 게임이 전문 작가를 고용하거나, 원래 매력적이었던 서사를 가지고 게임을 만들었는데도 호평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저는 이것이 더는 서사의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한 뒤,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아보았습니다.
먼저, 게임이 다른 매체와 비교했을 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다른 매체들의 장점을 조사해봤습니다. 책으로 대표되는 출판물의 경우, 비용의 제약에서 벗어난다는 것과 상상력, 이 두 가지가 장점입니다. 책은 작가의 글로서 묘사되는 세계와 그것으로 촉발되는 독자의 상상력의 힘으로, 저렴한 비용으로도 무엇이든 가능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영상물은 배우라는 강력한 무기를 손에 쥐고 있습니다. 이들은 실제 같은 연기로 시청자를 순식간에 몰입시키며, 화려한 CG, 숨 막히는 연출과 같은 고도로 발달한 기술은 몰입을 한층 더 강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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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호빗의 스란두일을 연기한 리 페이스 배우의 실제 같은 연기와 정말 실존할 것 같은 분장, 연출, CG는 영화가 도저히 허구라고는 생각되지 않게 만듭니다. |
이제 게임을 살펴보겠습니다. 게임에서 주로 사용하는 전달 방식은 글자와 컷신 영상입니다. 왜 게임은 이미 검증된 이 방식으로도 호평을 받을 수 없었을까요?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본 끝에, 몇 가지 답을 얻었습니다.
먼저, 게임은 서사의 재미뿐만이 아니라, 게임 플레이 정보도 전달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소설 같은 재미있는 글도, 정보 전달도 아닌, 읽고 싶지 않은 장문의 글을 만난 것으로 느껴집니다. 집중해서 읽어보려고 해도 공부하듯 외어야 할 것만 같은 정보의 바다는, 이야기의 집중을 크게 떨어뜨립니다.
두 번째, 타 영상 매체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부족한 게임의 기술력이 전달력을 저하합니다. 영화의 경우, 늙은 나이까지 평생을 연구하는 전문가와 함께, 이를 위한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인 최첨단 기술이 있습니다. 하지만, 서사가 수많은 콘텐츠 중 하나인 게임은, 영화만큼 분야를 세분화하지 않는데, 게임 개발자의 업계 수명은 짧기까지 합니다. 또한 서사에 많은 돈을 투자할 여유가 없는 것이 보통이죠.
세 번째, 게임 속 인물의 부족한 연기력이 몰입을 저하합니다. 가상의 캐릭터의 연기가 실제 배우가 연기하는 것보다 몰입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으며, CG 영화처럼 인물의 감정 표현을 위해 천문학적인 비용을 투자할 수 있는 게임 회사는 극소수입니다. 그러다 보니, 플레이어 입장에선 연기력이 엉망인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를 보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플레이어의 하드웨어 사양에 따라 경험이 달라집니다. 커피 몇 잔의 돈만 투자하면 고품질 영상과 음향을 갖춘 영화를 프레임 저하 없이 감상할 수 있는 영화와는 달리, 게임은 영화와 비슷한 품질을 경험하려면 고성능의 PC나 게임 콘솔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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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차티드 4 콘솔 패키지 게임은 이야기 비중이 높아서 그래도 영화 수준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온라인 게임에서는 가장 먼저 포기하는 것 중 하나가 이야기입니다. |
4. 게임만의 장점 : 상호작용
그렇다면 게임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매체가 책에서 영화로 변화했을 때, 영화가 자신에게 맞는 형태로 스토리텔링을 발전시켰듯, 게임도 기존 매체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게임에 적합한 형태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게임 연구가가 말하듯, 게임의 가장 두드러지는 강점은 바로 상호작용입니다.
앞서 기존 매체들의 특징은 일방향성, 즉, 정보를 전달하기만 한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게임은 반대로 콘텐츠 소비자가 정보를 역으로 제공하기도 하며,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매체의 내용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기존 매체는 인물이 언쟁하든 주먹다짐을 하든, 독자 혹은 시청자는 거기에 끼어들 수 없었습니다. 완전한 제삼자의 입장이었지요. 반면에, 게임은 플레이어가 직접 관여합니다. 게임에서 그들은, 더는 제삼자에 머무르지 않고 서사를 풀어나가고 승리를 달성하는 주체가 됩니다. 내가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는 감각은 이전 매체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아주 강력한 몰입과 체험을 선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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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사막의 커스터마이징 흔히 게임에서 제공하는 캐릭터 커스터마이징의 본질은, 꾸미고 싶다는 욕망을 넘어, 나를 대변한다는 개념에서 출발합니다. 캐릭터와 나를 동일하게 보는 것. 그것이 기존 매체와 다른 게임의 장점입니다. |
5. 게임에 적용된 사례
게임의 이런 장점을 적용하는 움직임은, 주로 서사 비중이 높은 콘솔 게임에서 적극적으로 보입니다. 위쳐 3는 다양한 상황에서의 플레이어 선택에 따라 서사의 전개나 결말이 바뀌는 방식으로 완벽한 상호작용을 구현했으며, 호라이즌 제로 던은 성격 성향을 반영하는 선택지를 제시하여, 인물에게 플레이어의 성격을 투영했습니다. 모바일 게임의 경우, 프린세스 커넥트에서 각 상황에 어떤 캐릭터에게 관심을 보일 것인지에 대한 선택지를 제공하여, 캐릭터에 애정을 갖도록 유도했습니다. 캐릭터 수집형 게임의 목적에 맞는 형태를 찾은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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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한 선택지에 따라 분기가 생기는 위쳐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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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에 따른 성격 성향을 반영하는 호라이즌 제로 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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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에 대한 호감 표현이 목적인 프린세스 커넥트 |
6. 게임이 나아가야 할 방향
위 사례를 통해 공통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은, 대화 선택지를 통해 플레이어가 서사에 직접 참여하고 있다고 느끼게 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위 게임들은 상호작용이 게임의 강점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대화 선택지라는 형태로 그것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런데, 이런 부류의 이야기가 나오면, 대화 선택지에는 반드시 서사의 분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개발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분기가 없는 선택지는 존재 의의가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택지, 곧, 상호작용의 본질이 분기가 아니라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됩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친구들과 하는 사소한 대화들은 어떤 분기를 하고 있지 않지만, 그것을 통해 우리는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고 친밀감을 쌓습니다.
예를 들어, 동료들과 모험을 끝내고 쉬는 자리에서, 플레이어가 그저 동료들의 대화를 듣기만 해야 한다면, 기존 매체보다 나은 점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죽는 줄만 알았다", "별것 아니다"와 같이 모험에 대한 가벼운 담소를 나누거나, "A는 괜찮냐", "B는 다치지 않았느냐"라는 형태로 동료 중 한 명을 걱정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플레이어를 게임 속 인물들과 더 깊이 교감할 수 있습니다.
즉, 플레이어가 실제로 게임 세계 속에 참여하고 있다는 느끼도록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게임 내러티브와 게임 매체가 추구해야 할 방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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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마스터 밀리언 라이브 시어터 데이즈의 단일 선택지 기획사 사장이 "맡아주겠느냐"는 질문에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의미 없어 보이지만, 플레이어에게 뭔가 시작해야 겠다는 느낌을 주기엔 충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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