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프로젝트 세일러

무대로서의 레벨

1. 시작하기 전에
  리니지2 레볼루션 개발 당시, 퀘스트에 따라 BGM을 전환하는 기능은 있었지만, 레벨의 환경을 변화시키는 기능까지는 없었으며, 이로 인해 시나리오와는 동떨어진 분위기가 자주 연출되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제2의 나라의 개발과 서사에 관한 공부를 병행으로 진행하면서, 게임의 레벨이 단순히 플레이 공간을 넘어서, 게임 서사를 위한 무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선 레벨의 환경이 서사의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해야 했습니다.
제2의 나라 개발 당시,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한 많은 고민과 시도를 했었고, 이 글은 이때의 생각과 시도를 정리한 것입니다.

리니지2 레볼루션의 글루딘 가도 퀘스트
언데드가 습격한 항구지만, 분위기가 너무 밝아 몰입이 잘 되지 않습니다.


2. 타 매체에서의 무대
  그렇다면 타 매체에서는 무대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을까요? 게임과 가장 유사하다고 생각되는 영화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이야기 전달이 목적인 영화에서 무대는, 전달하려는 이야기의 분위기나 인물의 감정에 초점을 맞춰 구성됩니다.
예를 들어 행복한 상황이라면, 무대는 햇빛이 창창하면서 생명이 넘치는 정원이 될 수 있으며, 슬픈 상황이라면 구름이 끼고 비가 내릴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인 예시를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 : 반지 원정대의 배경 중, 로스로리엔이라는 곳입니다. 이곳은 원작에서는 빛나는 황금빛 잎사귀를 가진 나무로 인해서, 항상 따뜻하고 밝은 황금빛 숲으로 묘사됩니다. 하지만 실제로 영화에서는 대단히 어둡고 무채색이 은은히 빛나는 곳으로 구현되었습니다. 단편적으로 보면 원작을 파괴한 못된 결정처럼 보이지만, 영화의 메이킹 필름에서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찬란했던 역사가 끝나고 쇠락해가는 요정들의 상황과 현재 반지 원정대가 처한 음울한 상황(간달프의 죽음)을 표현한 것"

만약 원작처럼 숲을 황금빛이 찬란한 곳으로 묘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간달프의 죽음을 목격한 관객들의 감정이 로스로리엔까지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며, 관객들은 앞으로 희망찬 미래가 있을 것이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반지의 제왕 원작의 로스로리엔
황금빛이 찬란히 빛나는 곳으로 묘사된다.

반지의 제왕 영화의 로스로리엔
쇠락하는 요정, 원정대의 암울한 현실을 반영하듯, 어둡고 아련하다.


3. 무대로서의 레벨
  이런 세밀한 무대 설정 작업은, 특히 서사를 담고 있는 게임 장르에 적극적으로 적용해야 합니다. 게임에서는 무대 역할을 하는 것이 레벨이므로, 이것이 전달하려는 서사, 경험, 감정에 맞춰 제작, 변화해야 합니다. 따라서 레벨 기획자는 무대를 만드는 영화의 연출, 배경 감독과도 같다는 마음가짐(제가 항상 후임 동료분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는 말입니다)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이런 레벨은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요?

가. 전반적인 분위기 구성
  레벨을 제작하기 전에는 보통 거기서 앞으로 진행될 서사가 정해져 있으며, 레벨 기획자는 레벨을 제작하기에 앞서 그곳의 서사를 파악합니다. 이때, 우리는 전달해야 하는 서사의 분위기와 흐름을 파악해야 합니다. 파악할 때는 개별 사건과 함께 레벨 전체의 주제 의식을 찾습니다. 이 중, 주제 의식을 통해서 레벨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구성합니다. 개별 사건의 경우, 각 사건이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가져야 할 수도 있는데, 이것을 모두 레벨에 반영하려고 하면, 분위기가 지나치게 자주 바뀌어 경험의 흐름, 성능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주제 의식을 확인했다면, 시나리오 기획자 및 아트팀과 회의를 거쳐 레벨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어떻게 구성할지 논의합니다.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만약 주제 의식이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밝다면, 레벨 전체를 밝게 만듭니다. 하지만 주제 의식이 무거움에도 불구하고, 전개 과정에선 드러나지 않다가 마지막에 드러난다면, 전반적으로는 밝게 하다가 무거운 주제가 드러나기 시작하는 부분부터 서서히 어두워져야 합니다.

마비노기 영웅전의 아율른
아율른의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카단이 처한 상황을 잘 대변해줍니다.

나. 개별 사건에 따른 변화
  레벨의 기본적인 구성을 서사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맞춰서 구성했다면, 다음은 서사 내 개별 사건에 분위기를 맞출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보통 개별 사건은 서사의 분위기를 급격하게 변경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거기에 맞춰 레벨의 분위기를 변경해주지 않으면 매우 어색한 장면이 연출됩니다. 예를 들어, 마을에 불이 났는데, 불만 타오르고 있고 주변이 주황빛으로 물들지 않는 상황이 되는 것이죠.
개발 중인 게임이 온라인이 아니라면 변화를 주려 해도 그다지 고민할 것이 없습니다만, 온라인 게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플레이어마다 서사의 진행 정도가 모두 다르지만, 공간은 다 함께 공유하므로 모두에게 맞는 환경을 동시에 제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플레이어는 마을 평화로울 때, 다른 플레이어는 마을이 습격받아야 하는 상황이어야 할 수 있습니다. 기존의 MMORPG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3가지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1) 인스턴스 던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개별 사건에 맞춘 레벨을 일시적으로 생성했다가 버리는 방법입니다. 기존의 문제는 공간을 공유해서 발생한 것이므로, 아예 개별 사건의 공간을 기존 레벨에서 구현하지 않고 별도로 분리한 뒤, 그 서사 시점에 맞는 플레이어 각자에게 공간을 줬다가 서사가 끝나면 버리는 것이죠.
장점은 개별 사건에 최적화된 레벨, 분위기, 연출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오프라인 게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게임 경험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또한, 높은 난이도의 공략 콘텐츠가 새로 추가되는 것이므로 플레이어에게 새로운 즐길 거리가 생기기도 합니다. 단점은 던전으로 제작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사건에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평소에 거닐던 마을에서 비가 오는 날에 라이벌과 말다툼을 벌인다는 형태의 사건은 던전으로 만들 수가 없습니다. 또한, 시간적, 금전적 제작 비용이 몹시 비싸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개별 사건이 많거나 큰 것일수록 플레이어에게 제공되는 시기는 점점 늦어지며, 기다림에 지친 플레이어는 게임을 떠날 것입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줄다자르 공성전
평소에는 마을인 이곳을, 공성전이라는 서사를 위해 던전화시켰습니다.

2) 위상 변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가 리치왕의 분노 확장팩에서 처음 도입한 기술이며, 지금까지도 사용하고 있는 방식입니다. 레벨 하나를 서버에서 여러 채널로 분리한 다음, 각 채널을 개별 사건에 적합한 환경으로 만든 뒤, 플레이어를 진행하고 있는 서사에 맞는 채널로 진입시킵니다. 아마 블리자드에서도 공유하는 공간에서 개별 사건에 의한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개발한 기술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 방법은 장점은 던전으로 만들 정도로 크지 않은 작은 사건도 적합한 변화를 줄 수 있게 되었다는 것과 플레이어가 던전으로 생각하지 않는 필드에서도 서사에 따라 레벨이 변화하는 싱글 플레이 게임 같은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MMO에서는 치명적인 단점을 만들게 되는데, 바로 플레이어 간의 상호작용이 장점인 MMO에서, 필드에서조차 다른 플레이어와 접점이 적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해외의 유명 게임 스트리머 중에는 위상 변화가 MMO로서의 재미를 해치고 있으므로 없어져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서사를 진행하고 나면 다시 갈 수 없는데도 채널을 계속 유지해야 하므로, 영구적으로 서버의 부하도 가중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 군단에 등장하는 아르칸도르
이곳은 서사 진행에 따라 죽었던 나무가 점차 되살아나며, 피난민이 늘어납니다.
이로 인해, 같은 장소라도 플레이어는 최소 4개 이상의 채널로 갈라집니다.

3) 퀘스트 전용 인스턴스 월드(채널)
  PC 온라인에서는 트리 오브 세이비어, 모바일 MMORPG에서는 리니지2 레볼루션이 적극적으로 사용했으며, 이제는 모바일 MMORPG의 가장 보편적인 방식입니다. 퀘스트에서 개별 사건을 연출해야 하는 시기가 왔을 때, 1인용 채널(월드)를 생성하여 플레이어를 잠시 격리했다가, 퀘스트가 완료되면 플레이어를 다시 공용 채널로 돌려보내고 1인용 채널은 제거하는 방식입니다. 

이번에도 장점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이 방법은 전환이 매우 쉽고, 전환 시 처리가 많지 않으며, 활용도가 높아, 기획자의 자유도가 크게 올라가서 잘 활용한다면 상당히 준수한 퀄러티의 퀘스트를 만들 수 있습니다. 또한, 채널을 생성했다가 용도가 끝나면 제거하므로, 위상 변화에 비교해 서버의 부하도 영구적이지 않습니다. 
이번엔 반대로 단점을 생각해볼까요? 처리가 많지 않다는 것을 장점으로 이야기했습니다만, 이것은 다르게 말하면 대규모 환경 변화는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환경이 변화하는 경우보다는, 공용 채널에서 연출했을 때 어색할 수 있는 단발적 상황을 연출할 때 쓰입니다. 또한, 전환이 매우 쉽다고 하여 너무 자주 사용하게 되면,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잦은 화면 전환, 로딩을 만나 몰입이 저하될 수 있으며, 서버 입장에서는 플레이어 1명당 하나의 채널을 생성했다가 지워야 하므로, 특히, 게임이 막 런칭한 시기라면, 짧은 시간에 수만 개의 채널을 생성하고 제거해야 해서, 위상 변화와는 비교할 수 없는 부하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 1인용 채널에서 잔류하는 시간이 많으면 많아질수록 공용 채널에서의 플레이어 간 접점이 줄어든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리니지2 레볼루션의 퀘스트 인스턴스
토벌대에게 시험을 받는다는 개별 사건 구현을 위해서,
플레이어를 일시적으로 1인용 채널로 이동시켰다가 데려옵니다.

4) 그럼 무엇이 정답인가?
  그래서 이 세 가지 방법 중, 무엇이 가장 좋은 방법이냐고 묻는다면, 제 생각에는 때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 정답인 것 같습니다. 던전은 비용이 매우 비싸지만, 초대형 사건을 연출하고, 플레이어에게 어떤 영웅적인 경험을 주기 위해서는 이 방법만 한 것이 없습니다. 위상 변화는 영구적이라는 단점이 있지만, 레벨 변화의 폭이 크므로, 적절히 활용할 경우, 플레이어에게 매우 큰 감동을 선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군단 확장팩에서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린 유적에 버림받은 이들이 하나둘 모여들면서, 폐허였던 곳이 점차 낙원이 되어가는 것을 봤던 감동을 잊을 수 없습니다. 퀘스트 인스턴스 월드 역시, 너무 잦은 사용을 자제한다면, MMO 장르에서도 싱글 플레이 게임과 같은 연출과 감동을 선사할 수 있습니다. 리니지2 레볼루션 개발 당시, 처음으로 말하는 섬 마을의 토벌대 지원 퀘스트가 들어갔을 때, 많은 개발진이 재미있다고 해주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개별 사건에게 잘 어울리는 방법을 적용하는 것은, 온전히 콘텐츠 기획자의 몫입니다. 이 방법들을 사용했느냐 안 했느냐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을 사용했을 때, 플레이어의 몰입감도 헤치지 않고, 연출도 자연스러우며, 개발 효율을 최고로 끌어올림과 동시에 게임 성능의 안정성까지도 확보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죠. 이것들 사이의 균형을 얼마나 잘 맞추느냐가 그 콘텐츠 기획자의 역량을 정할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