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프로젝트 세일러

문제로서의 적 패턴 구성

1. 시작하기 전에
  예전에 팀원분들에게 "리니지2 레볼루션 시공의 균열 중에서 무엇이 제일 괜찮았나요?"라고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창조의 신전이나 용의 심장 사원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하지만 뜻밖에도 대답은 "창조의 신전이 가장 별로였고, 초기에 나왔던 피의 여백작 침소와 광기의 제단이 좋았으며, 특히 레오나드와 라모그가 재밌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대답을 해주셨던 분들께서는 그 이유로 "내가 학습해서 해냈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었지만, 창조의 신전은 너무 어려워서 그러지 못했다"라고 해주셨고, 이 대화는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프롬 소프트웨어의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그 당시 대화가 다시금 떠올랐고, 이 이야기를 프롬 소프트웨어 게임의 플레이 경험과 대조해보니 어렴풋이 그 해답을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재미있는 적 패턴이란 무엇일까, 이번 글은 이 고민에 대한 답을 정리하기 위한 것입니다.

리니지2 레볼루션의 레오나드
너무 쉬웠을 것이라 생각했던 이 보스가,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2. 적 패턴에 대하여
  먼저 적 패턴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패턴(Pattern)은 사전적 의미로 일정한 틀이나 형식으로 고정된 양식을 의미합니다. 즉, 적 패턴은 곧 일정한 틀이나 형식으로 고정된 적이라는 것인데, 이것이 재미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Art of GameDesign에서는 게임을 문제 풀이 활동이라고 하면서, 문제를 풀었을 때 오는 쾌감이 게임의 재미 중 하나라고도 했는데, 이때 게임에서 적은 플레이어에게 제시된 문제와도 같습니다. 즉, 적 패턴의 재미는 문제로써 제시된, 일정한 틀에 고정된 적을 처치했을 때 오는 쾌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게임에서 적 패턴의 재미는 문제 풀이 과정과도 같다고 했으므로, 우리는 다른 문제 풀이 과정을 분석함으로써 어떤 적 패턴이 재미있는지 알아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학 문제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는 먼저 문제의 지문을 보고 문제가 무엇인지 인지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문제를 분석한 뒤 답을 제시합니다. 마지막으로 옳은 답을 제시했는지 정답을 확인하는데, 제시한 답이 정답이라면 쾌감을, 오답이라면 벌을 받습니다. 
게임에서는 어떨까요? 전투 과정이 문제 풀이 과정이라고 한다면, 문제는 적이 아니라 적의 행동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적은 다양한 행동으로 문제를 제시하며, 플레이어는 그것을 보고 문제를 인지한 뒤, 분석하여 답을 제시합니다. 그리곤 정답을 확인하는데, 제시한 답이 정답이라면 플레이어는 적을 공격하는 데에 성공하거나 적의 공격을 회피할 것이며, 오답이라면 적을 공격하는 것에 실패하거나 적에게 공격을 받게 되는 것이죠. 

문제에 대해 고민하다가 정답을 풀었을 때의 쾌감
그 쾌감이 바로 적 패턴 재미의 핵심입니다.


3. 레오나드와 디케의 사례
  이제부터 앞서 살펴봤던 것을 토대로, 리니지2 레볼루션의 레오나드가 더 좋은 평가를 받았는지 분석해보겠습니다. 레오나드의 패턴 구조를 살펴보면, 자상(방어력 감소) 효과를 부여하는 공격 기술 3개와 자상을 가진 플레이어에게서 핏덩이라는 자폭 몬스터를 소환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와 동시에 주기적으로 빈혈 효과로 인해 기절하거나 자신의 생명력을 소모하여 다량의 핏덩이를 소환했습니다. 

레오나드에게서 학습해야 하는 것은 매우 단순했습니다.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공격 기술을 피하면서 공격만 하면 되었고, 피하지 못해 자상을 입은 경우, 핏덩이가 소환되었을 때 도망간다는 것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체페슈의 창이라는 기술이 일정 확률로 두 번 연속 공격하기는 했으나, "한 번 더 공격할 수도 있다" 정도의 학습만 하면 되는 형태였습니다. 또한 주기적으로 레오나드에게 빈혈이 일어난다는 것만 인지하면 되는 수준의 학습만 필요했습니다.
문제 풀이 구조 역시 직관적이었습니다. 레오나드의 공격을 회피하지 못하면 내 캐릭터의 머리 위에 자상 효과 아이콘이 크게 표시되었기 때문에 문제를 명확히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자상 효과가 제거될 때는 핏덩이가 소환되어 나만을 노리고 달려들기 때문에 이것이 회피하지 못한 것에 대한 벌이라는 것 또한 명확했습니다. 만약 공격을 한 번도 받지 않아서 자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레오나드가 빈혈에 빠졌을 때 온전히 공격에 집중할 수 있으므로 정답에 대한 상도 명확했죠.

리니지2 레볼루션의 레오나드의 소환체 핏덩이
레오나드의 공격을 피하지 못한 것에 대한, 인지 가능한 명확한 벌을 제공했습니다.

그렇다면 창조의 신전의 디케는 어떨까요? 디케에게는 4대 원소의 상성에 따라 올바른 속성 원소를 획득해야 하는 원소의 시험, 각 플레이어에게 4대 속성 중 하나를 부여하고, 부여된 속성에 따라서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하는 정령의 시험이 있었습니다. 

디케의 경우, 학습의 측면에서부터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리니지2 레볼루션에는 기존에 속성 상성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보니, 플레이어가 생소한 속성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쉬움 난이도부터 순차적으로 복잡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최고 난이도를 가야 하는 고레벨 플레이어에게는 해당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애초에 문제를 인지조차 하지 못하므로, 분석까지 이어질 수 없었습니다. 결국 플레이어는 답을 제시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속절없이 당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죠. 
패턴별로 봤을 때는, 원소의 시험의 경우, 벌은 명확하고 강력했지만, 상이 없어서 플레이 경험이 좋지 못했습니다. 벌은 즉사에 이르는 피해를 주었지만, 상은 그저 살아남는 것뿐이었습니다. 정령의 시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상은 그저 살아남을 수 있는 것뿐이라 이게 상인지도 잘 모르는데, 잘못하면 전멸이라는 강력한 벌이 있었습니다.

어째서 이런 패턴이 탄생했는지 돌이켜보면, 레오나드가 나왔을 때는 던전이 너무 쉽다는 평이 많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것이 던전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은 생각 못 하고, 다음 던전을 "작정하고 어렵게 만들어보자"라고 판단했던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어렵다고 하더라도 인지와 보상이 명확했다면 재미라도 있었겠으나, 그러지도 못했습니다.

리니지2 레볼루션의 디케의 정령의 시험
극단적으로는 무슨 행동을 해야 하는지 아에 알려줬음에도 학습이 어려웠습니다.


4. 재미있는 적 패턴
  우리가 앞선 사례로 배워야 하는 것은 2가지입니다. 적 패턴을 어떻게 구성해야 재미있는가와, 어려운 패턴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입니다.

재미있는 적 패턴을 구성하는 방법은 적 패턴 역시 문제 풀이 과정의 하나라는 것을 명확히 이해하는 것입니다. 문제 풀이 과정은 앞서 살펴봤던 것처럼 문제의 제시, 문제의 인지, 분석, 답의 제출, 정답 확인의 과정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때 유의해야 할 것 첫 번째로, 모든 적 패턴은 플레이어가 충분히 인지하고 분석할 수 있도록 제시해야 합니다. 문제가 기존 레벨링을 무시한 너무 생소한 것이거나, 혹은 문제를 제시하는 행동이 너무 다른 행동과 비교했을 때 너무 구분하기 어려워 문제임을 인지할 수 없어선 안 됩니다. 두 번째로, 플레이어가 답을 제출했을 때, 그 답에 대한 상과 벌이 명확하면서 인지 가능한 것이어야 합니다. 상만 있고 벌이 없으면 너무 쉬워 재미가 없으며, 벌만 있고 상이 없으면 너무 어렵고 성취감이 떨어집니다. 또한 상과 벌이 모두 있더라도 플레이어 입장에서 그것이 인지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프롬 소프트웨어의 다크 소울3
이 게임의 전투가 재미있는 것은, 상과 벌이 극단적으로 명확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난이도의 경우는 수치가 아닌 패턴의 난이도를 이야기합니다. 난이도 상승의 열쇠 역시 문제 풀이 과정 자체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수학 문제의 배점이 높게 책정되는 것은 그 문제의 난이도가 높기 때문이지, 배점이 높으므로 난이도가 높은 게 아니라는 것을 유의합니다.
난이도가 올라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올바른 답을 제시하기 어렵다"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때도 중요한 것은 바로 인지입니다. 답을 제시하기 어렵다는 것은 문제를 인지하고 나서 답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지, 문제의 인지 자체가 어려워 답을 제시하기 어려워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보다는 적의 행동을 응용적(연계, 복합, 속임수 등)으로 만들어서 오답의 확률을 높이거나, 문제 인지와 답 제시 사이의 시간을 아슬아슬하게 만들어서 빠른 반응을 유도하는 것이 옳습니다. 또한, 그것 외에는 오답의 벌을 강화(불리한 효과를 주거나, 넘어지는 등)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이 게임은 난이도를 상승시킬 때, 패턴을 추가하는 것 외에도
벌을 강화하는 방법(디버프 추가 등)을 자주 사용합니다.


5. 마치며
  프로레슬링에서는 "맞는 사람이 잘 맞아줘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단순한 스포츠를 떠나서 엔터테인먼트, 즉 쇼이기 때문이죠. 게임도 플레이어에게 어떤 계획된 재미를 보여준다는 점에선 엔터테인먼트라고 생각합니다. 즉, 게임 속의 적도 프로레슬링의 적처럼 잘 맞아줘야 한다는 것, 혹은 적절히 잘 반응해줘야 한다는 것이죠. 따라서 적은 플레이어의 재미를 위해서 최적화된 쇼를 보여줄 필요가 있고, 기획자는 그 쇼를 위한 완벽한 각본을 만들어야 합니다. 관객의 반응뿐만 아니라 그 반응에 대한 연기자의 이차적 반응까지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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