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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하기 전에
번지 사의 데스티니 가디언즈가 국내에 정식 오픈했을 때, 다른 무엇보다 저를 놀라게 했던 것은 레벨 구조, 스토리, 적 패턴도 아니라, 가방과 아이템에 당당히 자리 잡고 있는 글자 하나, 전투력이었습니다. 전투력은 중국산 MMORPG를 통해 많이 알려졌습니다. 그래서인지 게임을 처음 접속했는데, 전투력이라는 단어를 보면 왠지 거부감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유의해야 할 것은 형태가 다소 다르더라도 이런 수치적 성장 척도가 국내외를 막론하고 널리 퍼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많은 게임사가 전투력(수치적 성장 척도)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분명한 사실은, 블리자드조차도 어느 순간부터 애드온에서만 표시해주던 아이템 레벨을 아예 시스템적으로 제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획자인 우리는 전투력이 감성적으로 좋고 나쁨을 떠나서, 그것의 존재 의의에 관해서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전투력의 존재 의의는 바로 성장 피드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하나씩 풀어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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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 패키지 게임에서는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전투력이 데스티니 가디언즈에 나타났습니다. |
2. 기존 RPG에서의 성장
전투력 이전에는 주로 과제의 극복을 통해 성장 피드백 전달했습니다. 게임에서 역할의 기술과 함께 장애물을 제시한 뒤, 그것을 극복하게 하여 성취감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죠. 이 방식은 가장 자연스럽지만, 약점이 있습니다. 바로 성취감을 얻기까지 너무 큰 노력과 시간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공격대가 왜 1주일에 한 번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콘텐츠는 가장 큰 성취감을 얻을 수 있으면서 가장 어려운 과제이기도 합니다. 25명을 모으기도 어렵지만, 한 번에 보상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실패하면 1주일을 기다려야 합니다. 심지어 아이템 레벨을 알 수 없었던 과거에는, 새로운 장비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내가 구체적으로 얼마나 강해졌는지 체감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게임을 살펴보겠습니다. 바로 블러드본입니다.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이 게임은, 난관을 돌파했을 때 대단한 성취감을 제공하지만, 끝없이 패배를 경험하다 보면 점차 무력감에 빠져들게 되어 게임을 그만두게 됩니다. 일반 몬스터를 처치하여 강해지려고 해도, 1씩 올라가는 능력치를 보고 있노라면 한숨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이처럼 기존 RPG의 성장 방식은 대부분 성장 피드백의 구간이 매우 길거나, 피드백을 확실히 느끼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이는 캐릭터가 성장하는 것이 핵심 중 하나인 RPG, 특히, 게임이 마니아층보다는 대중을 겨냥하는 것이라면 매우 치명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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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본의 레벨업 화면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 비해선 직관적이지만, 여전히 성장을 체감하기 어렵습니다. |
3. 전투력의 등장
여기서 잠시 다른 길로 빠져서 추억의 만화 드래곤볼을 살펴보겠습니다. 전투력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만화인데, 전투력이 끊임없이 상승하다가 측정기가 폭발하고 마는 이 한 장의 이미지가 왜 전투력이 주목받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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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볼의 전투력 측정기기 스카우터 이전에는 추측만 했던 상대의 강함을 구체적인 수치로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
전투력은 힘, 민첩, 지능 등으로 분산되어 있던 성장 척도를 숫자 하나로 환산하여 플레이어의 수준을 제시해줍니다. 이를 통해서 플레이어는 아무리 작은 수치라고 할지라도 확실히 성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도전하려고 하는 콘텐츠보다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혹은 얼마나 더 강한지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온라인 게임에서는 플레이어 간의 강함 차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서 성장 욕구를 더욱 강력히 자극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취감을 얻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부분 역시 해소되기 시작했습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1주일 만에 공격대를 완료했을 때, 장비를 획득하면 700만큼의 전투력을 올릴 수 있었다고 했을 때, 전투력을 적용한 모바일 게임에서는 이것을 100씩 7번으로 나누어 매일 100을 올릴 수 있도록 구성하여, 매일 성장한다는 느끼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전투력이라는 개념이 들어감으로써 개발자는 성장의 경험을 주기 터무니없이 쉬워졌으며, 플레이어는 성장을 체감하기가 너무나도 쉬워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소 감성이 없는, 수치적인 느낌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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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니지2 레볼루션의 결투장 적나라하게 표시되는 전투력 수치로 강함의 차이를 쉽게 체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4. 전투력의 폐해
하지만 이렇게 만능처럼 보이는 전투력도 폐해를 만들어냈습니다. 성장의 경험을 주기 쉬워졌다는 것은 게임을 감성보다는 기능 위주로 보는 사람들에겐 대단히 매력적인 부분입니다. 기간, 노력 대비 개발 효율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좋아질 수 있기 때문이죠. 이것은 과제 해결보다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것을 좋아하는 고 과금 플레이어들의 니즈와 맞물려 강력한 힘을 얻게 됩니다. 이런 흐름은 결과적으로 깊은 고민을 하여 레벨 구성을 할 필요 없이, 그저 수치만 올려주면 되는 것이 아니냐는 개발 풍토가 유행하게 했습니다. 플레이어들은 수치 상승에 반응하기 때문에 감성을 너무 챙길 필요 없다는 인식이 생긴 것이죠.
예를 들어, 던전의 패턴이 재미없어도 어차피 거기서 주는 보상이 매력적이면 한다(수치가 오르는 게 보이면 한다)라는 식의 어떤 공식이 생긴 것이죠. 플레이어 입장에서 보면 이게 무슨 무책임한 소리냐며 어이없어할 수도 있습니다만, 실제로 많은 게임의 매출 지표가 이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매출이 플레이어의 숫자와 직결되지는 않습니다만, 게임 회사도 이익을 추구하는 회사이기 때문에 플레이어 접속자 수보다는 매출에 더 끌리기 마련입니다.
이런 인식은 갈수록 게임의 구조를 이상하게 만들었습니다. 도전 콘텐츠는 플레이어의 조작 실력보다는 능력치의 영향이 커지도록 만들어야 전투력이 과제 해결에 영향을 주는 비율이 커지기 때문에 갈수록 더 쉽게, 다 단순하게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쌓이는 수치만 보여주면 되기 때문에 던전을 자주 업데이트할 필요 없이, 죽지 않고 수치만 쌓이는 형태의 던전이 주목받기 시작하고, 콘텐츠 업데이트 빈도는 대단히 낮아졌습니다. 반면에 갖가지 방법으로 전투력을 올릴 수 있는 기상천외한 시스템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으로 룬 또는 별자리 각인, 몬스터 도감이나 장비 도감, 흑정령과 같은 것들입니다. 결과적으로 모바일 게임, 특히 모바일 MMORPG는 갈수록 도전할 거리는 없는데, 이상하게 배워야 할 것도, 해야 할 것도 많아지는 기괴한 형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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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하의 장비 도감 도감 콘텐츠는 이런 흐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시스템 중 하나입니다. |
5. 전투력의 신뢰도
전투력으로 인해 발생한 또 하나의 문제는 바로 신뢰도입니다. 드래곤볼에서 말하는 전투력 수치는 어떻게 산출된 것일까요? 육체적인 능력, 기의 보유량, 기의 잠재량, 정신력, 민첩성... 전투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셀 수 없이 많아 모두 찾아내기 어렵습니다만,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육체적인 능력과 정신력을 비교했을 때, 전투력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혹은 보름달이 뜨면 거대 원숭이로 변하는 것은 어떻게 측정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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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져의 전투력 530,000은 어떻게 산출된 것일까요? |
이와 같은 문제가 게임에서도 벌어집니다. 당연히 여기서 전투에 영향을 미치는 무수히 많은 조건이 있습니다. 힘, 민첩, 지능, 회피 등의 보편적인 능력치부터 시작해서, 속성이 있는 게임이라면 속성도 영향을 미치며, 캐릭터의 스킬 레벨이나 직업 간 상성도 전투 결과에 영향을 줍니다. 당연히 이런 조건들을 모두 고려하여 완벽한 전투력을 산정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보다 전투력이 낮은 상대에게 패배하는 일을 겪게 되고 높은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또한 일단 전투력 개념을 게임에 넣기로 했다면, 게임에 존재하는 모든 능력치에 전투력을 주어야 합니다. 일단 전투력이 있는 것을 알게 된 플레이어는 거기에 영향을 주지 않는 능력치나 콘텐츠에는 거의 반응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장 피드백이 명확해진 만큼, 피드백이 없는 것도 명확해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전투력에 영향을 주는 요소는 더 많이 늘어나고, 신뢰도는 사실상 바닥을 치게 됩니다.
6. 결론
이런 폐해와 단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투력, 아니 정확히는 수치적 성장이, 성장 피드백이 명확하지 못하다는 과거의 문제를 보완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레벨 기획 관점에서 성장 체감을 더 자주, 확실히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장점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완전히 부정하거나 긍정하기보다는 장단점을 명확히 알고,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예를 들면,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아이템에 착용 레벨이 아닌 아이템의 레벨을 표시하여, 대략 이 아이템은 이것보다 이 정도 수치가 좋다는 정도의 가이드 개념으로 활용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전투력만큼 성장 피드백이 강력히 오진 않겠지만, 플레이어가 자신의 평균 아이템 레벨을 보고 자신이 구체적으로 얼마나 성장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각 능력치가 아이템 레벨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너무 세부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이것이 게임의 절대적인 척도인 것처럼 표시하지 않기 때문에, 아이템 평균 레벨의 신뢰도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지 않은 상태라서 신뢰도의 문제가 커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수치적 성장 척도를 제공하여 성장 피드백을 확실히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대신, 그것에 너무 의존적으로 되지 않도록 주의하면 개발자와 플레이어 모두가 행복한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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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템 레벨은 성장 피드백을 확실히 주면서, 너무 신뢰하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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