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프로젝트 세일러

기억과 인출

1. 시작하기 전에
  레벨 기획의 목적은 중 하나는, 플레이어에게 문제와 해법을 학습시킨 다음, 이 과정을 더 심화하여 그들이 더 높은 성취감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무에서 튜토리얼 기획을 해보면서 플레이어가 기억하기 쉬운 방식으로 전달하지 않으면 아무리 정보를 전달해도 의미가 없으며, 정보가 전달되었더라도 그들이 제때 그것을 떠올리지 못한다면 이 역시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정보를 전달하곤 "플레이어가 알아서 기억하고 떠올리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기획자로서 대단히 무책임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번에는 책 마이어스의 심리학을 참고하여, 심리학에 기반하여 플레이어가 기억하기 쉽도록 정보를 전달하는 방법과 그들이 필요할 때 정보를 기억해낼 수 있도록 하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정보를 전달했는데, 막상 필요할 때 기억나지 않았다면 실패한 기획이 아닐까요?


2. 기억의 과정
  우선, 기억이 어떤 과정으로 이뤄지며 쉽게 기억하기 위해서 그동안 어떤 방법을 사용해왔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정보를 뇌에 기억하는 과정은 아래와 같다고 합니다.

감각기억일시적으로 등록
단기기억에 전송
되뇌기로 정보를 부호화
장기기억으로 이동

여기서 중요한 것은 되뇌기와 부호화입니다. 부호화란 정보를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배열로 체제화시켜 청크(덩어리)로 만드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 두 과정을 거쳐서 장기기억으로 이동되지 못한 정보들은 쉽게 손실된다고 합니다.

또한, 심리학에서는 쉽게 기억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이론이나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자기참조 효과는, 자기와 연관된 것으로 생각하는 정보면 더 잘 기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내일 철수를 찾아갈 테니 기억해라"라는 것보다 "내일 너를 찾아갈 테니 기억해라"라는 것이 더 잘 기억될 수 있다는 것이죠. 또한, 깊은 처리정보를 의미상으로 접근하여 부호화하면 더 잘 기억할 수 있다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단어를 외운다고 했을 때, 그 단어의 의미를 함께 기억하면 더 외운 것을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고 추상적인 것보다는 구체적이고 시각화할 수 있는 것들을 더 잘 기억한다고 합니다. 소설책에서 주인공의 이름을 글자로만 보는 것과 삽화가 있는 소설에서 그의 생김새까지 보는 것 중, 후자가 더 기억이 잘 된다는 것입니다. 간격두기 효과는 짧은 시간에 집중하는 것보다 여러 시간대에 걸쳐 분산시킬 때 더 잘 기억한다는 이론입니다. 30분 집중해서 보고 다시 안 보는 것보다는, 10분씩 1시간마다 3번에 나눠 걸쳐서 보면 더 잘 기억한다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검증효과는 학습할 때 자기검증을 수행한다면 학습 효과를 증진하는데 더 기여할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학교나 학원에서 쪽지 시험을 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죠.

기억의 과정


3. 기억의 인출
  정보를 기억했다고 해서 끝난 것은 아닙니다. 필요할 때 정보를 기억해낼 수 있어야 플레이어가 게임에서 주어진 과제를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기억을 효과적으로 꺼내는 방법(인출)으로 인출단서를 제안합니다. 이것은 떠올리려 하는 정보에 접속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기점, 어떤 방아쇠와 것을 이야기합니다. 어떤 기억에 인출단서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쉽게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죠. 최선의 인출단서는 기억을 부호화할 때 형성한 연합이라고 합니다. 이를 암묵기억이라고도 하는데, 앞서 살펴봤던 기억이 우리가 의식적으로 집중해서 기억(외현기억)하는 것이라면 이 암묵기억은 무의식적으로, 본능적으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흔히 주인공들이 어떤 사물을 보고 과거의 상황이나 인물을 떠올리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좋은 예입니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 맥락의존 기억이 있는데, 기억을 경험했던 시점과 유사한 상황(맥락)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기억인출이 점화한다는 것입니다. 술을 먹을 때 경험했던 것이, 술만 마시면 다시 떠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인출단서를 활용할 때는 유의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간섭입니다. 이것은 순행간섭(기존 기억이 새 기억을 방해)과 역행간섭(새 기억이 기존 기억을 방해)이 있는데, 이 두 가지는 모두 어떤 기억들이 동일한 인출단서를 가질 때 발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전자의 예는, 자물쇠를 새것으로 바꾸면서 비밀번호를 바꾸게 되면, 이전 자물쇠에서 사용했던 비밀번호가 새로 산 자물쇠의 비밀번호를 기억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후자의 경우는 노래를 누군가 개사, 편곡해서 부르게 되면 원곡이 기억나지 않고 개사된 것이 기억나는 현상입니다.

기억을 떠올릴 수 있게 해주는 것들


4. 게임에 적용하기
  기억에 대해 자세히 알아봤으니, 이제 실제로 게임에 적용해볼 시간입니다. 어떻게 하면 게임 기획에 적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여 아래와 같이 정리해보았습니다.

가. 학습 대상을 부호화 및 인출단서와 연결하기
학습할 것, 부호화 예제, 인출단서를 나열하여 서로 연결합니다. 부호화 예제의 경우, 플레이어 스스로 부호화하여 기억할 것이라 믿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걸로 부호화하면 더 쉬워, 앞으로 이것으로 계속 알려줄게."라고 제시하는 것이 더 학습하기 쉽습니다. 또한, 이렇게 하면 플레이어의 학습과 기억을 조금 더 의도대로 제어할 수 있으리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인출단서를 나열하는 것은, 단서가 중복되어 간섭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플레이어가 의도된 순간에 필요한 기억을 인출하도록 하려면 학습시켰던 기억들 사이에 간섭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나. 플레이어에게 의미 있게 제시하기
사람은 자기참조 효과로 인해 자신과 관계있는 것을 더 쉽게 기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학습 대상이 플레이어와 관계있는 것처럼 제시해야 합니다. 제시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두 가지 예를 한번 만들어봤습니다.
첫 번째는 정보를 전달하기 전에 플레이어의 닉네임을 언급합니다. 정보를 전달하기 전에 학습자를 언급함으로써 나와 관련된 것이라는 느낌을 받도록 하는 것이죠. 마치 학교에서 선생님이 특정 학생을 지정하여 질문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두 번째는 직접학습을 유도합니다. 자기참조 효과를 생각하면 역시 모방학습(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는 것)보다는 직접학습을 유도하여, 학습의 여부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플레이어가 직접 느끼도록 하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다. 시각화하여 전달하기
심리학에서 구체적이고 시각화할 수 있는 것을 더 잘 기억한다고 했던 것처럼, 게임에서 정보를 전달할 때도 최대한 구체적으로 시각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언가 설명할 때 텍스트로만 설명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되며, 시스템이나 UI를 설명할 때는 실제 화면을 보여주며 설명해야 합니다. 만약 실제 화면을 보여주는 것이 여의치 않다면, 그 화면을 머릿속으로 연상할 수 있도록 장면을 텍스트로 묘사해서라도 시각화할 수 있게 유도해야 할 것입니다.

라. 깊은 처리 유도하기
앞서 기억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의미상으로 접근하면 더 쉽게 기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보통 게임에서 제공하는 튜토리얼을 보면 대부분이 방법에 치중된 경향을 보입니다. 가령 룬각인 시스템을 설명한다면, 능력이 강해진다는 설명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대부분이 각인 방법에만 집중합니다. 이 때문에 정작 플레이어가 강해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오면, 룬각인을 떠올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룬각인 방법을 집중적으로 전달받았지, 그것이 강해지는 방법이라는 것은 강조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게임에서 정보를 전달할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플레이어가 그것을 이해하여 목적지를 찾게 되면, 도달하는 방법은 스스로 찾게 될 것입니다.

마. 장기기억에 기억하게 하기
정보를 장기기억에 기억하게 하려면 2가지만 기억하면 됩니다. 바로 되뇌기자기검증입니다. 
되뇌기에서 중요한 것은 여유를 가지고 반복해서 되뇌도록 하는 것, 바로 간격두기 효과입니다. 게임 대부분이 튜토리얼로 플레이어에게 정보를 전달하고 나면 거기서 끝나곤 합니다. 심지어 최근 모바일 게임은 초반에 튜토리얼을 몰아 놓고는 주입식으로 딱 1회만 알려준 뒤, 나머지는 플레이어의 학습 능력에 맡기는 행태를 벌입니다. 플레이어는 게임을 즐기기 위해 하는 것이지 공부를 하려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되뇌기는커녕, 한번 전달된 정보를 기억하려 할 리가 없습니다. 이래서는 정보가 단기기억에서 모두 소멸할 뿐이죠. 따라서, 플레이어가 기억해야 하는 어떤 정보가 있다면, 반드시 간격을 두고 여러 번 전달하여 되뇌기를 유도해야 합니다.
되뇌기를 유도할 때는 검증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질문 형태로 구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보를 반복해서 전달한다고 해도, 그저 퀘스트의 대화를 읽는 것처럼 휙 지나가는 형태라면 되뇌기나 자기검증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간단하고 짧은 형태라고 하여도, 플레이어가 한 번쯤은 기억을 담고 있는 머리 뚜껑을 열어보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라. 인출단서 활성화하기
게임에서 문제를 제시할 때, 플레이어가 학습한 것을 인출할 수 있도록 학습한 것과 연결했던 인출단서를 함께 제시합니다. 그럼 플레이어는 백지상태에서 기억을 찾지 않고, 인출단서를 통해 실마리를 얻을 수 있게 되므로, 길을 쉽게 발견하여 기억을 손쉽게 인출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위쳐3의 전투 튜토리얼

실제 적의 행동을 미리 보는 형태이므로 부호화 예제, 인출단서도 제공되며,
내가 전투하므로 나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직접학습입니다. 

적과 나의 행동을 눈으로 확인하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시각화되어 있고,
내 행동의 결과가 무엇인지 바로 확인하므로 깊은 처리도 가능합니다.

한 두 번에 끝나지 않고 반복하므로 되뇌기도 가능하며,
내가 직접 행동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가므로 자기검증도 가능합니다.

실제 전투 상황이므로 향후 전투 시 맥락의존 기억으로 인출도 쉽습니다.


5. 마치며
매번 느끼지만, 실무에서는 현실적인 문제(시간, 업무량) 때문에 이런 것을 모두 고려하기 상당히 어렵습니다. 하지만 플레이어가 무언가 제대로 학습하지 못했을 때, 최소한의 되뇌기를 제시하지도 않았으면서 이것은 플레이어의 문제라며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진 않았는지 반성해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제가 해본 수많은 게임, 특히 모바일 게임 중에서는 플레이어가 정보를 다시 보길 원할 때 그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구조를 잘 만들어둔 게임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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