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프로젝트 세일러

반복 콘텐츠와 무작위성

1. 시작하기 전에
  기획자에게 반복해서 해야 하는 콘텐츠의 기획은 대단히 어려운 과제입니다. 플레이어가 수십 번, 아니 어쩌면 수백 번 반복할 반복 콘텐츠. 일일 퀘스트 같은 것은 플레이 타임이 짧고 쉬우므로 다소 반복하더라도 플레이어가 감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MMORPG의 던전과 같은 경우로, 반복 플레이를 해야 하나, 플레이 타임이 길고 집중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피로감이나 지루함이 월등히 높습니다.
그 동안 많은 게임이 이 문제를 높은 비용을 들이더라도 던전 개수를 늘리는 형태로 없애왔지만, 이 방법은 플레이어의 콘텐츠 소비 속도를 맞추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어 비용 대비 효과가 좋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지루함 줄이기에 소정의 성과를 얻은 게임도 있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런 게임을 만든 개발자는, 해결책이 무작위(랜덤)에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였고, 이것을 더 명료하게 정리하기 위해 글로 써보았습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던전 : 리치왕의 분노(상)와 격전의 아제로스(하)
확장팩이 거듭되면서 이 게임의 던전 수는 점차 줄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무작위가 있었으리라 판단합니다.


2. 반복 콘텐츠의 문제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정면으로 맞서야만 옳은 해결책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먼저 반복 콘텐츠에서 흔히 발생하는 문제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두 가지를 선정해보았습니다.

첫 번째, 반복하게 되면 예측 가능해져 지루해집니다.
많은 인스턴스 던전들이 정해진 순서를 따라 진행하는 일방향성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매 번 던전을 방문할 때마다 구조가 같습니다. 즉, 플레이어는 한두 번만 플레이해도 던전의 구조를 기억하기 때문에, 얼마 안 가서 정답을 아는 수학 문제를 풀어야 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예측되어 시작도 하기 전에 지루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두 번째, 과정이 힘들면 보상을 얻기도 전에 좌절합니다.
재미있는 콘텐츠는 무엇일까요? 게임성 측면에서 봤을 때, 우리는 보통 플레이어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거나, 어려운 난이도를 통해 공략의 재미를 주는 것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이런 재미를 반복 콘텐츠에서 주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공략을 위한 높은 집중과 끊임없는 생각을 매번 요구받는 플레이어는 얼마 안 가서 피로함과 귀찮음을 느끼게 되고, 결국엔 최종적인 보상을 얻지 않았더라도 콘텐츠를 포기하게 됩니다.

종합하면, 예측할 수 없어 매번 새로움을 느껴야 하면서도, 과정이 어렵지 않아야 플레이어가 최종 보상을 얻을 때까지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아! 이것 참 이상론 같은 말이 아닐 수 없군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고민을 이미 충분히 한 뒤, 나름대로 해결책을 제시한 게임들도 있습니다. 지금부터 그것들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AFK 아레나의 이계의 미궁
매번 도전할 곳과 보상을 선택하는 이 콘텐츠는,
처음에 접하면 재미있다고 느끼나 1주일만 지나도 귀찮다는 사람이 점점 많아집니다.


3. 디아블로
  이 게임은 레벨 구조를 무작위로 조합하는 시스템을 통해, 매번 게임에 입장할 때마다 레벨 구조를 변경합니다. 이 방식은 레벨을 여러 개의 블럭(모듈)로 만든 뒤, 각 모듈 간의 접합 가능 부위를 데이터로 기록하여 게임 시작 시 블록들을 재조립합니다. 이렇게 하면 게임을 반복 플레이하더라도 항상 같은 장소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주면서, 적은 리소스로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특히 핵 앤 슬래쉬 MORPG에서는 자주 사용하는 기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 단점도 있습니다. 이 방법은 플레이어가 여기가 같은 곳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에, 조립되는 모듈 레벨이 모두 평범한 구조, 외형을 가집니다. 플레이어의 관심을 사로잡는 어떤 특징이 있는 순간, 지난 번에 왔던 곳이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죠. 그래서 레벨에 구조적, 시각적 충격을 주기 어렵습니다. 또한, 무작위로 조립하기 때문에 플레이어의 경험을 완벽히 제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강적을 예상치 못한 시점에 만나거나, 전체적으로 난이도가 일관되는 성향도 보입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반복의 지루함을 타파하는 대신, 평범함을 택하는 전략이죠.

디아블로3 1막의 지도
자세히 보면 같은 구조를 가진 레벨이 격자에 맞춘 것처럼 배치되어 있습니다.


4. 마비노기
레벨을 매번 재조립한다고 하니 MO에서만 가능한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던전을 인스턴스로 만드는 MMORPG에서도 사용한 적이 있는데, 마비노기가 좋은 예시입니다. 이 게임은 콘텐츠 흐름이 거의 던전으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레벨업을 하기도 하고, 각종 재료를 얻거나 희귀한 의상을 획득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던전을 매우 많이 반복할 수밖에 없는데, 이 게임은 던전에 디아블로와 같이 레벨 무작위 조립 시스템을 사용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앞서 디아블로를 이야기할 때, 레벨 무작위 조립은 경험이 평이하다는 말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마비노기는 레벨의 구조뿐만이 아니라 그 안의 콘텐츠까지 무작위로 만들어, 아무리 자주 던전을 방문해도 전체적인 경험까지 매번 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그야말로 무작위의 향연이라고 할 수 있죠. 이 덕분에 플레이어는 같은 던전을 수없이 돌아도 "다음은 어떤 방이 나올까?"라는 긴장 혹은 기대를 하게 되어 지루함을 덜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래는 그 레벨의 무작위 콘텐츠의 몇 가지 예시입니다.

ㆍ상자 레벨
던전 내 몬스터의 난이도가 천차만별인데, 상자를 열기 전까지는 누가 등장할지 몰라서 열기 직전까지 긴장하게 됩니다.

ㆍ구슬 레벨   
4개의 구슬 중 하나만이 문이 열리는 이 레벨은, 운이 좋으면 몬스터를 하나도 잡지 않고도 통과할 수 있어서 높은 기대 심리를 만듭니다.

ㆍ미믹 레벨
수많은 상자 중 하나에만 열쇠가 들어있고, 나머지는 모두 미믹으로 된 이 방은 소소한 재미를 줍니다.

ㆍ분수 레벨
그냥 지나가도 되지만 자신 있다면 운을 도전해볼 수 있는 이 레벨은, 완전한 회복부터 치명적인 피해까지 다양한 효과를 무작위로 제공합니다.

ㆍ보상 레벨
긴 던전의 중간 부분 혹은 던전의 마지막에 있는 이 레벨은, 단순히 보상을 무작위로 주는 것이 아니라, 제한된 상자를 가지고 플레이어가 직접 나눠 선택하게 합니다.

마비노기의 구슬방은 운이 좋다면 전투 없이도 통과할 수 있습니다.


5.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이 게임은 레벨 무작위 조립 방식을 사용하지 않고도 무작위 경험을 주려 시도했습니다. 최초로 이런 시도를 확인할 수 있었던 확장팩은 리치왕의 분노였으며, 군단 확장팩까지 와서는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이번에는 그 중 잘 된 경우로 비전로라는 던전을 살펴보겠습니다. 비전로는 군단 때 추가된 던전으로, 길을 여러 갈래로 만든 다음, 던전 생성 시 길의 일부를 문으로 닫아서 플레이어가 매번 다른 동선으로 진행하게 했습니다. 플레이어는 지도에서 자물쇠가 걸린 문 표시를 확인하여, 이번에는 어느 문이 닫혔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디아블로나 마비노기의 던전 구조 무작위 조립 방식과 유사하지만, 그런 복잡한 시스템을 거치지 않고도 무작위 경험을 줄 수 있는 참신한 방법입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비전로 지도


6. 잘못된 활용한 경우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는 비전로처럼 MMO에서 무작위를 주려고 한 시도를 자주 볼 수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무작위를 넣으려 한 시도가 오히려 반복 의지를 꺾는 사례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자세히 살펴보고 반복 콘텐츠에 무작위를 넣을 때는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진행도통제력 : 보랏빛 요새
이 던전은 적에 의해 풀려난 죄수들을 물리치는 내러티브를 가진 곳입니다. 이곳에 들어가면 갇혀 있는 다양한 보스를 볼 수 있으며, 도시를 침공한 적은 매번 무작위로 죄수 하나를 풀어줍니다. 이를 통해 플레이어가 감옥 한 자리에서 매번 다른 보스와 전투하도록 하여 반복의 지루함을 줄이려 한 것이죠.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곳은 비선호 던전 중 하나가 되었는데, 저는 그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던전을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어렵습니다. 게임에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은 매우 중요합니다. 보통 플레이어가 게임에 바라는 것은 성취감이기 때문이죠. 이들은 전투 없이 길을 따라 앞으로 가는 것만으로 성취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던전은 플레이어를 한 장소에 계속 머물러 있게 하고, 진행도는 화면 위에 조그마한 숫자로 제공하기 때문에,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어려워 정체된 느낌을 받습니다.
두 번째는 플레이어가 통제력을 상실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억압받기보다는 통제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 던전은 준비 시간을 준다는 이유로 보스전 사이에 몇 분 정도의 대기 시간을 넣었습니다. 처음에는 플레이어가 이를 감사히 여길지 모르겠지만, 던전에 익숙해지면 이 시간은 어쩔 수 없이 기다려야만 하는 답답한 것이 됩니다. 이때 플레이어는 다음으로 나아갈지, 대기 혹은 그만둘지를 정할 수 있는 통제력을 상실한 상태가 됩니다. 이것은 곧 불필요한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는 막대한 스트레스를 발생시킵니다.

반면에 디아블로와 마비노기는 점점 깊숙이 들어가는 구조라서 나아간다는 느낌을 주면서, 플레이어 자신이 나아갈지 기다릴지 정할 수 있었습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보랏빛 요새

두 번째, 노력 시간 : 용맹의 전당과 별의 궁정
용맹의 전당의 보스 펜리르의 독특한 점은 등장 위치가 매번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 보스는 매번 동굴 또는 사냥꾼의 천막 중 한 곳에 등장하는데, 정답은 그의 발자국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별의 궁정은 플레이어가 파티에 숨어든 적을 찾는 임무를 수행합니다. 이들은 하객들과 대화하면서 적의 외모에 대한 단서를 찾고, 이것을 종합하여 적을 발견해야 다음 단계로 진행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적의 외모는 무작위라서 매번 던전에 갈 때마다 다시 찾아야 하죠. 이 던전들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문제는 바로 퍼즐이라는 것입니다. Level Design for Games라는 국외 레벨 기획 교본에서는 퍼즐은 플레이어가 생각하게 하므로 게임의 진행을 느리게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바로 생각느린 진행이죠. 이것들은 숙제처럼 해야 하는 반복 콘텐츠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플레이어로서는 반복해야 한다면, 머리를 쓰지 않으면서 빨리 끝낼 수 있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무작위성이 있는 퍼즐이 들어가면, 매번 생각해야 할 뿐만이 아니라 시간도 지체됩니다. 만약 피치 못할 사정으로 퍼즐이 들어갔다면 거기서 지체된 시간을 다른 형태로 없애줘야 하지만, 이 두 던전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비전로와 디아블로, 마비노기의 레벨 무작위 조립은 생각할 필요 없이 길을 따라 나아가기만 하면 되며, 마비노기의 무작위 콘텐츠 역시 생각할 필요 없이 그저 여러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하기만 하면 됩니다. 또한, 무작위 선택에 의한 보상이 확실하기까지 합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용맹의 전당 던전의 펜리르 발자국


6. 마무리하며
  명확한 끝이 없는 온라인 RPG에서 반복 콘텐츠는 피할 수 없는 숙명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반복 콘텐츠의 무작위성 역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용하기에 따라 득이 되기도 실이 되기도 하므로 앞선 예시들을 통해 배운 아래 내용을 항상 생각하며 콘텐츠를 기획해야 할 것입니다.

반복 콘텐츠예측할 수 있고 과정이 어려우면 이탈을 유발합니다.
무작위반복 콘텐츠의 단점을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습니다.
ㆍ무작위를 넣을 때는 아래의 내용을 고려해야 합니다.

진행 감각 :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통제 감각 : 플레이어가 던전 진행 여부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경험 체감 : 각 무작위 결과가 체감 가능한 경험을 제공해야 합니다.
적은 노력 : 무작위가 너무 많은 노력을 요구해선 안 됩니다.
빠른 진행 : 무작위가 콘텐츠 플레이 시간을 늘려선 안 됩니다.
공짜 보상 : 무작위 결과로 이득을 봤다는 느낌을 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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