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프로젝트 세일러

온라인 RPG와 사회적 욕구


위 두 게임이 온라인/오프라인 RPG의 역할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1. 시작하기 전에
  RPG에 관한 생각을 정리하면서 새로 발생한 의문이 있습니다. 바로 플레이어에게 예술성을 인정받았으나 장기 흥행에 실패하는 온라인 게임도 다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게임들은 역할 집중이 부족해서 실패한 것일까요? 몇몇을 직접 해본 경험으로는 그러지 않았으며, 오히려 성공한 게임보다 더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시스템, 콘텐츠, 밸런스, BM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문득 온라인 RPG와 오프라인 RPG의 경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이것을 집중적으로 다뤄볼까 합니다.


2. 욕구 피라미드
  우선 매슬로우의 욕구 피라미드라는 유명한 심리학을 한번 보겠습니다.


이 피라미드는 하단의 욕구를 충족해야만 상단의 것을 추구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위에서 두 번째에는 존경의 욕구가 있습니다. 여기에 속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성취욕인데, 보통 게임은 이것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많이 말합니다. 시나리오의 완결을 보는 것이나 강력한 적에게 도전하여 승리하는 것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또한 존경받고자 하는 것도 포함되는데, 흔히 높은 점수를 획득하여 상위권에 들려는 것처럼, 같은 게임을 하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심리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 아래에는 사회적 욕구가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구로, 보통 현실의 가족, 친구 등을 통해 해소합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온라인 게임 안에서 사회적 욕구를 해소하기도 합니다. 마음이 맞는 사람과 친구를 맺고, 길드를 결성하는 과정 등이 여기에 해당하죠. 흥미로운 것은, 심리학계에서 사회적 욕구가 피라미드에 속한 것이 아니라, 모든 단계에 영향을 미치는 독립적인 욕구로 봐야 한다는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회적 욕구의 중요성은 전보다 훨씬 커질 것입니다.

여기서 놓쳐선 안 되는 사실 중 하나는, 아래에 있는 욕구가 더 우선이 되는 것처럼, 욕구를 해소해주는 것 역시 아래에 있는 것일수록 더 강력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존경의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책이 눈 앞에 있다고 해도, 화장실이 가고 싶다면 책을 내려놓고 화장실부터 가야만 하는 것처럼 말이죠.


3. 오프라인 RPG의 역할과 경험
  위쳐, 헤일로, 라스트 오브 어스처럼 흥행한 오프라인 RPG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완결(특히 시나리오적으로)이 있다는 입니다. 이 경우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플레이어가 시나리오 속 주인공에게 더 깊이 몰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플레이어의 역할이 게임 세계 속 특정인을 대변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위쳐에서는 플레이어가 게롤트를 조작하거나, 언챠티드에서는 네이선 드레이크를 조작하는 것처럼 말이죠.

오프라인 RPG의 역할은 존경의 욕구 중 하나인 성취감을 위한 것처럼 보입니다. 시나리오의 흐름에 따라 성취감을 제공하고, 그것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역할이나 각종 시스템, 콘텐츠를 구성하는 것이죠. 그리고 당연히 플레이어 간의 상호작용을 고려한 요소는 거의 없습니다(최근에는 점점 이 부분도 챙기는 모습을 보이긴 합니다만).



4. 온라인 RPG의 역할과 경험
  시대가 흘러 게임이 온라인으로 확장되자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플레이어들이 가상 공간에서 인간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죠. 그들은 스스로 뜻이 맞는 사람을 찾아 만나더니, 공동의 이익과 소속감을 위해 집단을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곤 거기서 더 나아가 다른 집단과 자신들을 비교하고 경쟁을 벌이기도 했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게임이 온라인이 되면 전보다 더 많은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플레이어는 온라인 RPG에서도 여전히 성취감을 얻기를 원하는 한편, 다른 이들과 함께하기를 원하기도 하고(사회적 욕구), 그들에게서 존경받거나 혹은 더 우월해지기를 원하기도 합니다(존경의 욕구 중 자존감, 우월감). 이 모든 것이 인간관계의 일환이며, 여기서 그 주체는 캐릭터의 인격이 아니라 플레이어 자신입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오프라인 RPG와는 다르게, 온라인 RPG는 캐릭터가 플레이어 자신이라는 감각에 더 치중해야 한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습니다.

리니지 시리즈의 혈맹은 플레이어의 사회적 욕구의 결정체입니다.


5. 온라인 및 오프라인 RPG의 차이
  앞서 살펴본 것들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회적 욕구는 존경의 욕구보다도 우선되거나 더 중요한 것으로 보이며, 온라인 RPG와 오프라인 RPG와는 다르게 가지고 있는 강점은 바로 사회적 욕구 해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게임의 예술성을 이야기할 때, 오프라인 RPG에 있는 것만을 놓고 비교하며, 온라인 RPG의 강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온라인 RPG를 평가할 때는 오프라인 RPG와 다르게 몇 가지를 더 생각해봐야 합니다.

첫 번째, 플레이어가 캐릭터를 다른 인격이 아닌 자신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온라인 게임을 할 때, 그 속에서 인간관계를 맺고자 하는 주체는 플레이어 자신입니다. 하지만 오프라인 RPG처럼 시나리오 속 주인공의 인격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캐릭터가 자신이 아닌 또 다른 인격을 가진 누군가인 것으로 인지시킵니다.

두 번째, 사회적 욕구 해소가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게임 개발 시에는 언제나 현실에 부딪히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을 강요당하기 마련입니다. 특히 예술성과 사회적 욕구의 경우가 자주 충돌하는데, 온라인 RPG에서는 보통 예술성을 포기합니다. 왜냐하면, 오프라인 RPG와 비교했을 때 온라인 RPG가 지는 강점은 사회적 욕구 해소이며, 그 욕구는 존경의 욕구(성취감)보다 더 저차원(근본적)이면서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죠.
대표적인 예로 그래픽에 관해 말해보면, 예술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더 고퀄러티의 그래픽을 제공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말은 다른 시각에서 보면 저사양 기기를 가진 플레이어는 게임을 즐길 수 없다는 것이고, 그럼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플레이어의 규모가 작아지게 되겠지요. 비슷한 이유로 시나리오 콘텐츠를 개인에 맞춰 제공하면 더 예술적인 형태로 제공할 수 있을 것이나, 함께하는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예술성을 포기하고 단순하지만 함께할 수 있는 형태를 추구하기도 합니다.

세 번째, 온라인 RPG의 성취감 제공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성취감을 위해선 끝이 있는 콘텐츠가 필요합니다. 끝이 있다는 것은 소모성이라는 것이고, 어지간해선 다시 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랜 시간 서비스를 해야 매출이 발생하는 온라인 RPG는, 지속적인 성취감을 제공하기 위해선 끊임없이 콘텐츠를 업데이트해야 합니다. 그러나 플레이어의 콘텐츠 소비 속도는 언제나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에, 개발팀이 그 속도에 맞춰 콘텐츠를 제공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반면에 인간관계 속 욕구는 유동적입니다. 나 또는 타인의 행동으로 만족 여부가 변하기 때문에, 욕구를 계속 만족하려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욕구와 만족의 무한한 순환을 만듭니다. 이런 이유로 온라인 RPG를 개발할 때는 예술적인 것보다는, 업데이트를 기다리는 동안 플레이어들끼리 즐길 수 있는 것을 위주로 개발합니다. 예를 들면 PVP 콘텐츠가 이런 부류이고, 그래서 특히 온라인에는 RVR이 많은 것이죠.

출시 당시 큰 인기를 누렸던 BnS. 그러나 지속력은 리니지를 넘어서지 못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바탕으로 리니지와 블레이드 앤 소울을 비교해보겠습니다.
누가 봐도 예술 면에서는 블레이드 앤 소울의 손을 들어줄 것입니다. 홍문파 막내로써 문파의 복수를 하고, 재건하는 시나리오 플롯은 매우 훌륭합니다. 던전 콘텐츠 역시 공략하는 맛이 있다고 정평이 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비해 인간관계를 유도하는 시스템, 콘텐츠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입니다. 그 때문에 콘텐츠 업데이트가 제때 되지 않으면 금세 이탈로 이어집니다.
반면에 리니지는 블레이드 앤 소울과 비교했을 때, RPG로서는 시나리오든, 던전이든, 연출이든 다소 심심한 편입니다. 그러나 혈맹 시스템이 플레이어가 게임 속에서 인간관계를 만들도록 도와서 사회적 욕구를 해소합니다. 또한 공성전이나 요새전과 같이 혈맹 간 관계 변화를 유도하는 수많은 시스템과 콘텐츠들은 이 욕구를 지속적으로 자극합니다.

또 다른 예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이하 와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게임은 종족 연합의 일원이라는 역할을 플레이어 간 상호작용 요소로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여러 콘텐츠에서 "우리는 모두 종족 연합(얼라이언스, 호드)의 전우"라는 것을 내세워서 플레이어가 연대감을 느끼게 합니다. 또한 캐릭터에게 또 다른 인격을 부여하지 않아서, 플레이어가 그것을 온전히 자신으로 인지하기 쉽습니다. RVR 콘텐츠는 다른 연합과의 갈등을 통해, 같은 연합 플레이어 간의 유대감을 강화합니다.

진영 갈등을 핵심 역할로 하여 플레이어 간 상호작용을 유도하는 와우

이번에는 PVP에 지나치게 치중되어 있지 않으나 세계적으로 성공한 MMORPG로 파이널 판타지 14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게임은 리니지나 와우와는 달리 PVP나 RVR에 치중되어 있지 않습니다. 전체적으로 시스템이나 콘텐츠 구성 역시 오프라인 RPG와 같은 형태를 띠고 있지요.
그러나 이 게임은 경쟁이 없이 플레이어 간의 상호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요소를 많이 준비했습니다. 자유 부대로 불리는 이 게임의 길드 콘텐츠는, 그들만의 아지트를 가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내부 공간을 자유롭게 꾸미고, 함께 관리할 수 있습니다. 캐릭터의 다양한 외모 종류나 의상들, 수십 가지에 육박하는 감정표현 모션은 상호작용의 재미를 더욱 끌어올려 줍니다.

경쟁보다는 함께 하는 모험이 핵심인 파이널 판타지 14


6. 결론
  정리하면, 장기 흥행에 성공한 MMORPG는 플레이어의 사회적 욕구를 해소하는 것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온라인, 특히 MMO를 만드는 게임 기획자는, 자신이 만드는 게임이 왜 오프라인이 아니라 온라인을 택했는지와, 온라인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가 왜 오프라인이 아닌, 온라인 RPG를 플레이하기로 선택했는지를 생각하며 기획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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