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프로젝트 세일러

RPG에 관한 생각 4편 : 일거리


The Knight At The Crossroads By Viktor Vasnetsov

QUEST(원정) :
개요 : 목표를 향해 어려운 여행을 떠나는, 신화나 소설에서 사용하는 구성
목적 : 영웅들은 보통 원정을 통해 무엇 또는 누군가를 얻는다.

1. 일거리
RPG에 관한 생각 3번째는 바로 일거리입니다. 이것은 플레이어가 게임에서 실제로 플레이하는 것으로, 게임 경험과 직결되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렇다면 RPG에서 일거리는 어떻게 기획해야 할까요? 1편에서 RPG란 역할극이라고 했으며, 2편에서는 세계는 플레이어가 역할극에 더 잘 몰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보조 장치라고 했습니다. 즉, 일거리 역시 플레이어가 역할극에 몰입할 수 있도록 기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할극에 몰입할 수 있는 일거리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역할극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적합한 일을 수행해야 합니다. 즉, 역할의 직업이나 상황에 알맞은 일을 해야 하죠. 이 글에서는 이런 일거리를 전문형 일거리라고 명명하겠습니다. 이때 직업은 흔히 우리가 이야기하는 용사, 도둑, 마법사와 같은 것이고, 상황은 역할이 사는 세계나 역할의 상황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마을이 몬스터에게 공격당했거나, 마왕이 공주를 납치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스카이림의 전문형 일거리는 용잡이 일족 도바킨에 몰입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든 일거리가 역할과 직접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연관이 없음에도 있어야 하는 것도 있지요. 이런 것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현실에서도 일에 집중하기 위해선 취미 생활로 기분을 환기해야 하는 것처럼, 가상 세계도 플레이 환기를 위한 취미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거리를 취미형 일거리라 부르겠습니다. 기존 RPG는 보통 이것을 낚시, 농사, 장사, 요리 등으로 제공합니다. 이것은 게임에서 제시하는 역할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플레이어가 전문형 일거리를 수행하는 도중에 휴식, 환기의 시간을 제공합니다.

유의해야 할 것은 취미형이 전문형보다 우선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플레이어가 이 게임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목적을 잃어 흥미도 잃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실수는 보통 개발에 매몰되어 게임의 본질을 잊어버리면 쉽게 발생합니다.

그렇다면 명작 RPG에선 이들을 어떻게 기획했을까요?

MMORPG의 가장 흔한 취미형 일거리 중 하나인 '낚시'


2. 위쳐3
먼저 전문형 일거리입니다.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의 주 역할은 괴물사냥꾼 위쳐와 시리의 아버지입니다. 즉, 위쳐 직업을 가진 시리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겠죠. 이런 이유로 이 게임의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는 플레이어가 시리의 아버지로서 사라진 딸을 찾는 여정을 그립니다. 이것이 바로 시리의 아버지로서의 전문형 일거리(상황에 기반)이죠.
그렇다면 시리를 어떻게 찾을까요? 이 방법이 바로 위쳐 직업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게임 세계 속에서 게롤트는 매우 유명한 위쳐입니다. 따라서 게롤트는 위쳐다운 방법으로 그의 딸의 흔적을 추적합니다. 또한 탐문 수사를 하다 보면 게롤트에게 정보의 대가로 의뢰를 제안하는 인물들이 있는데, 이때 이 정보 제공자들이 의뢰하는 일거리는 필연적으로 위쳐와 관련된 일이 됩니다. 보통 의뢰는 상대방의 직업이나 특기와 관련된 것을 제안하기 마련이죠. 당연하지만 대단히 놓치기 쉬운 사실입니다.
그 외에 숨겨진 장비를 찾는다거나, 주민의 고민을 해소해주는 등의 일이 있는데, 이 역시 아무것이나 의뢰하는 것이 아니라, 위쳐와 연관 있는 일을 의뢰합니다. 괴물을 처치하거나, 실종된 사람 또는 위험한 곳에 숨겨진 물건을 찾는 것들이죠. 절대 밭을 갈거나 농작물을 수확하는 일은 맡기지 않습니다.

게롤트는 위쳐이기 때문에, 그가 할 것 같은 혹은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의뢰합니다.

취미형 일거리는 어떨까요? 위쳐3하면 유명한 것이 바로 카드 게임 궨트입니다. 궨트는 위쳐 세계 속 고대 전쟁을 카드 게임으로 구현했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습니다(다시 한번, 살아있는 듯한 세계!). 이 게임은 핵심 역할과 관계없는 독립 콘텐츠입니다. 하지만 전투 위주로 이루어진 위쳐3의 플레이 스타일을 환기하는 역할을 하며, 그 자체로도 재미가 있어 괴물은 안 잡고 궨트만 한다라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입니다. 이처럼 취미형 일거리는 게임 핵심 역할과 플레이 스타일과는 다소 다른 방향으로 기획하여 게임 플레이 스타일을 환기해야 합니다.

위쳐 3의 미니 게임 궨트 플레이 장면


3.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이 게임의 핵심 역할은 종족 연합(얼라이언스, 호드)의 전투원입니다. 이를 더 깊게 들여다보면 다시 종족 연합의 일원전투원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즉, 이 게임의 전문형 일거리를 구성하는 두 가지는 아래와 같을 것입니다.

ㆍ종족 연합에 이득이 되는 일
ㆍ전투원에게 의뢰할만한 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기 호박 수확해서 가져오기라는 퀘스트가 있습니다. 많은 MMORPG에서 쉽게 볼 수 있지만, 농부가 나와 무슨 관계이길래 도와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보상을 위해 꾸역꾸역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역할을 고려하지 않은 RPG는 대부분 일손이 모자라니, 혹은 정보를 원한다면 호박을 수확하라고 제안합니다. 하지만 보통 RPG에서의 플레이어의 역할은 전투원입니다. 즉, 게임 세계가 현실이라고 하면, 지금 이 NPC는 왕국 기사에게 일손이 모자라니 호박을 수확해달라고 한 것입니다. 기사로서는(플레이어) 기가 막힌 노릇입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어떨까요? 티리스팔 숲의 솔리덴 농장 호박 수집 퀘스트를 보면, 연금술사 요한은 플레이어에게 솔리덴 농장의 호박을 수확해오라 지시합니다. 이 호박은 연금술사의 역병 연구 재료가 되며, 그가 만든 역병 호박을 붉은 십자군 광신도에게 가져다주면, 그가 호박을 먹고는 언데드로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이 퀘스트에서 호박 수확의 목적은 언데드 포세이큰을 위한 신종 역병을 만드는 것이며, 이것은 위에서 이야기했던 내가 속한 종족 연합에 이득이 되는 일이 되므로 적절한 개연성을 갖게 됩니다.

농부 체험을 하듯 하느냐, 역병 연구를 위해 하느냐는 매우 큰 차이입니다.

취미형 일거리는 무엇이 있을까요? 와우는 놀이동산 게임이라는 말에 걸맞게 다양한 취미형 일거리가 있으며, 이것들은 전투원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플레이 패턴을 환기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낚시, 요리, 고고학, 각종 전문기술, 애완동물 대전, 축제 등이 있으며, 이 모든 것들이 종족 연합을 위한 계속된 전투 속에서의 숨 돌릴 수 있는 환기구를 마련해줍니다.


4. 리니지2 레볼루션 포스트모템
이 게임의 역할은 혈맹의 혈맹원(전투원)입니다. 그렇다면 역시 주요 콘텐츠는 어떤 방식으로든 혈맹의 일원 / 전투원과 관계있어야 합니다.
메인 퀘스트의 경우, 이 게임의 주제는 은빛 용병단과 어둠의 결사 대립입니다. 플레이어는 용병단의 일원으로 어둠의 결사 야욕을 저지하는데, 문제는 은빛 용병단은 혈맹과 관련이 없다는 점입니다. 게임의 주 역할 키워드가 혈맹, 혈맹 간의 분쟁, 공성이므로, 각 영지의 혈맹 연합과 어둠의 결사 대립으로 풀어냈으면 더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갔을 것입니다.
그 외에 주간 퀘스트, 일일 퀘스트, 퀘스트 스크롤 등 각종 콘텐츠도 혈맹과의 접점이 약합니다. 혈맹에 의뢰하는 형태로 구성한 뒤, 혈맹원과 함께 수행하면 추가 보상을 지급하는 등으로 풀었으면 혈맹과의 연계를 강화할 수 있진 않을까요?

다른 콘텐츠는 어떨까요? 혈맹 레이드, 아지트 퀘스트, 아지트 만찬, 요새전, 공성전, 혈맹 간의 전쟁 선포 등 많은 콘텐츠가 혈맹 위주로 구성되어 있으며, 플레이어가 혈맹의 일원이 되고 싶다고 느끼면서, 혈맹의 소속감 역시 느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아쉬운 점은 세계관 기반으로 풀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혈맹 레이드의 경우, 플레이어는 이 레이드 몬스터가 왜 죽어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저 보상을 주는 몬스터 중 하나이죠. 혈맹에 의뢰하는 영주의 토벌 의뢰 등의 개연성을 주었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또한 혈맹 간의 전쟁 선포 역시, NPC가 전쟁 중인 혈맹들에 대해 수군거린다거나, 대자보 등이 붙는 등의 상호작용하는 세계를 구현했다면 RPG 감성을 더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요?


혈맹이 핵심인 리니지2 레볼루션

취미형 일거리는 어떨까요? 출시 시점에는 취미형 일거리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잘못된 것이냐고 한다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시 시점에는 아직 플레이어가 게임의 핵심 역할에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취미형 일거리는 핵심 역할에 익숙해진 시점에 제공되어야 합니다. 온라인 게임은 출시 이후 최고 레벨 플레이어 비율, 레벨별 유저 이탈률 등에 기반하여 적절한 시기에 추가하면 될 것입니다.  지표를 확인하기 어려운 패키지 게임의 경우, 레벨 기획자가 플레이어가 핵심 역할에 적응했을 것이라고 판단되는 시점에 취미형 일거리를 제공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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