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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수라마르 풍경
이번에는 RPG의 기본 요소 중 세계에 대해 생각해보려 합니다.
1. 세계
보통 CG를 많이 사용하는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들의 인터뷰를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온통 녹색인 곳에서 아무것도 없이 연기를 하려니 몰입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아무리 경력 많은 전문 연기자이더라도 무대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으면 몰입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RPG는 어떨까요? 이것이 진행되는 가상 세계는 무대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플레이어는 물론 전문 연기자가 아니며 관객에 가깝다고 할 수 있죠. 관람하는 사람과 참여하는 사람, 그 경계에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갖춰지지 않은 무대에서 역할극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떨까요? 물론 몰입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역할에 쉽게 몰입하려면 마치 자신이 그 세계에 살고 있다고 느껴야 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그곳이 마치 우주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명작 RPG는 세계를 얼마나 자연스럽게 구성하고 있을까요?
그린 스크린 VS 잘 꾸며진 연극 무대
2. 위쳐3
갖가지 괴물을 사냥하는 것이 목적인 이 게임은 인간 환경 그뿐만 아니라 괴물들이 사는 환경까지도 살아있는 세계처럼 구현했습니다. 이 세계에서 위쳐는 달갑지 않은 존재로 여겨지는데, 이런 설정은 게임 세계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마을 사람들은 위쳐를 대할 때 노골적으로 언짢아하면서, 지나갈 때 침을 뱉는다거나 괜히 시비를 거는 등 다양하게 반응합니다. 이런 반응을 통해 플레이어는 스스로가 위쳐가 되었다는 것을 한층 더 자각합니다.
이 게임의 살아있는 듯한 모습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ㆍ이단 처벌을 부르짖으며 사람들을 설교하는 이터널 파이어 교단
ㆍ갈 곳을 잃어 이터널 파이어 종교에 목을 매는 빈민들
ㆍ피난민을 막기 위해 설치된 검문소
ㆍ검문소 앞에서 먹을 것을 구걸하거나 한탄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학대하는 병사들
ㆍ길거리에서 싸움이 벌어지면 겁에 질려 도망가는 주민들
심지어 이런 세계 묘사는 괴물들에게도 적용됩니다.
ㆍ버려진 성채를 좋아하여 주로 그런 환경에서 서식하는 엔트레가
ㆍ강가를 지나던 마차를 습격하여 그 시체를 뒤지고 있는 익사체들
ㆍ전쟁으로 폐허가 된 마을과 시체, 그리고 그 시체를 뜯어 먹으려 모인 네크로파지
ㆍ무덤 속의 시신을 들추자 자신의 시신을 들추는 게 불쾌했던 악령들
위쳐3의 네크로파지는 시신을 먹기 때문에 그런 곳이면 어디든 출몰한다
이런 세세한 묘사들이 게임 세계를 폴리곤 덩어리가 아닌 진짜 세계처럼 만들었으며, 플레이어로 하여 그들 자신이 정말 위쳐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합니다. 예를 들자면 연극을 할 때, 초보자끼리 하는 것보다는, 숙련자와 하는 것이 초보자를 연극에 더 빨리 몰입할 수 있게 해주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단순히 재미있어서라는 개념이 아니라, 응당 RPG라면 세계가 살아있는 것이 당연하며, 그래야 플레이어가 자신을 실제로 위쳐라 느끼기 때문입니다.
3. 엘더스크롤 4 : 오블리비언
이 게임 시리즈는 과거부터 살아 움직이는 듯한 세계라며 호평이 자자한데, 가장 큰 특징은 NPC입니다. 엘더스크롤의 모든 NPC는 자신의 삶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아침이 되면 자신의 집에서 나와 가게로 나가 장사를 시작하거나, 마을을 산책하다 마주친 다른 사람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기도 하며, 벤치에 앉아 디저트를 먹는 이도 있습니다. 경비병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치안을 유지하다가 범죄자가 나타나면 가차 없이 칼을 휘둘러 응징하기도 하고, 그 대상이 플레이어면 감옥으로 연행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밤이 되면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문을 잠그고 취침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온 건물의 불이 꺼지고 도시 역시 잠에 빠지죠. 이때 플레이어는 집 문을 몰래 열고 들어가서 물건을 훔칠 수 있는데, 시끄러운 소리를 낸다면 집주인이 즉시 일어나 불쾌함을 감추지 않고 경비병을 부릅니다.
엘더스크롤4 오블리비언의 여관. 뒤의 손님은 식사를 마치면 밖으로 나갈 것이다.
엘더스크롤의 개발자들이 이런 요소들을 여유가 남을 때나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면 이 NPC들에게 삶은 생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항상 시간과 자금의 싸움이 벌어지는 개발에서 여유라는 것은 사실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개발자들은 플레이어가 엘더스크롤에 몰입하려면 반드시 이 세계가 살아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4.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그럼 가장 성공한 MMORPG라며 칭송받는 게임은 어떨까요? 살아있는 세계가 온라인 게임에서도 충실히 구현되고 있을까요? 생각할 것도 없이 대답은 그렇다 입니다. 이 게임 역시 세계가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다양한 노력을 했습니다. 특히 눈에 띄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야생 동물이므로 이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보통 게임에서 동물들은 퀘스트를 위한 거쳐 가는 사소한 몬스터 중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게임 세계를 살아있는 것으로 본다면, 곰 하나, 사슴 하나까지도 모두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이 게임은 이것을 충실히 반영하였습니다. 많은 동물이 가족 단위로 무리 지어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니는가 하면, 수컷끼리 영역 다툼을 하기도 합니다. 사바나의 사자들은 햇빛을 피하고자 덤불 속이나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잠을 청하고 있으며, 사슴이나 타조 따위를 사냥하기도 합니다. 용들은 사냥감을 찾기 위해서 절벽 끝에 앞발을 세우고 앉아 주변을 둘러보고 있죠.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룬 숲. 고목 뿌리 사이사이에 사슴들이 앉아 쉬고 있다.
5. 루돌로지 VS 내러톨로지
이렇게 보면 자연스러운 환경이 당연히 있어야 할 것 같지만 실제론 많은 개발자가 없어도 되는, 여유가 넘칠 때나 하는 것이라고 많이들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기획자들, 특히 게임을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주체가 되어야 할 콘텐츠 기획자들도 말입니다. 명작을 배출한 개발사들도 그렇게 생각했다면 위와 같은 게임들은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제 견해로는 생각하는 방식의 차이인 것으로 보입니다. 게임을 하고 놀기 위해 정해놓은 규칙들의 집합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볼 것인지입니다. 해외에서는 전자를 루돌로지(Ludology), 후자를 내러톨로지(Narratology)로 이야기합니다. 이것들은 각각 게임의 재미가 규칙이나 메커니즘이 중심인지, 서사와 같은 예술성이 중심인지를 이야기합니다. 보통 완전한 루돌로지와 완전한 내러톨로지 그리고 중도파로 나뉘는데(저의 경우는 중도파입니다), 제 경험상 많은 국내 개발자가 루돌로지에 가깝습니다. 즉 규칙이나 메커니즘(성장, 경쟁 등)이 잘 되어 있다면 예술성은 중요치 않다는 것이지요.
일부 장르에서는 루돌로지의 주장이 맞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적어도 RPG, 즉 역할극 게임에서만큼은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루돌로지 성향이 강한 RPG를 먼저 접한 국내 플레이어들이야 그런 게임이 잘 맞을 수 있지만, 긴 게임 역사를 가진 해외는 내러톨로지 성향이 강한 RPG를 더 많이 접했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억측일 수 있지만 국산 RPG가 해외에서 쉽게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 부분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내러톨로지가 루돌로지에 가지고 있는 취약점이 있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것은 바로 수치적인 근거입니다. 규칙이나 매커니즘으로 대표되는 루돌로지는 매출이 얼마나 발생하는지 수치로 쉽게 나타납니다. 재화의 흐름, 장비 가챠 등이 대표적이죠. 반면에 예술성으로 대표되는 내러톨로지는 수치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자연스러운 세계나 아름다움이 매출에 얼마나 도움을 주었는지 나타낼 수가 없지요.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게임 회사는 이윤을 추구하는 곳입니다. 특히 라이브 서비스를 하는 온라인 게임에서는 지속적인 매출이 필수이기 때문에 수치는 더욱 중요해집니다. 따라서 내러톨로지가 등한시될 수 밖에 없죠.
이러한 인식이 바뀌려면 루돌로지 성향의 게임에 익숙한 플레이어 세대가 저물고, 내러톨러지 성향의 젊은 세대가 주 소비층으로 변화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아직 시대가 요원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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