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프로젝트 세일러

RPG에 관한 생각 2편 : 역할


괴물사냥꾼 역할을 맡게 되는 프롬 소프트웨어의 블러드 본

지난 글에서 RPG의 정의와 기본 요소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궁금증을 해결해볼 순서입니다. RPG를 만듦에도 무언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왜일까요?


1. 역할
RPG(Role Playing Game)란 가상 세계에서 역할을 맡는 게임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플레이어는 자신이 어떤 역할을 맡는지 알고 게임을 시작하고 있을까요? 혹은 RPG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요?
아마 플레이어 대부분이 게임을 시작할 때, 심지어는 플레이 중에도 이것을 모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역할에 관해 설명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RPG는 곧 역할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RPG를 하면서 역할을 모른다면 높은 확률로 플레이 목적도 모를 것이며, 게임 속 나 자신에게 몰입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친구들과 연극을 하는데, 거기서 내가 무슨 역할을 하는지 모른다면 어떨까요? 연극 자체의 성공과는 별개로, 내가 흥미를 잃어버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명작이라 평가받는 RPG들은 어떨까요? 역할에 관해 설명하고 있을까요?


2. 위쳐 3
이 게임은 인트로에서 세계의 상황과 플레이어가 맡을 역할인 위쳐가 어떤 이들인지에 관해 안내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또 하나의 영상, 플레이어가 맡을 또 하나의 역할인 게롤트가 흔적을 쫓아 누군가를 찾아다니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앞으로 플레이어가 위쳐이자 게롤트로써 무엇을 하게 될지를 안내합니다.


게임을 시작하면 튜토리얼에서 게롤트가 앞으로 찾아야 하는 이들을 보여주고, 그들을 왜 찾아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이윽고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되면 튜토리얼에서 만났던 이들을 찾아 헤매는 퀘스트가 계속 등장합니다.
이 모든 과정이 플레이어가 게임에서 주어진 역할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 역할을 충실히 이행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는 것이죠.


3.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이 게임에서는 첫 접속 시 종족의 배경을 컷신으로 안내합니다. 기원은 어떻게 되는지, 지난 업데이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플레이어는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지 등을 짤막한 내레이션으로 설명하죠. 언데드를 예로 들자면, 먼저 아래와 같은 인트로를 통해 종족의 현실에 대해 안내하면서 영상 말미에 포세이큰의 일원으로써라는 말로 플레이어가 포세이큰의 일원이라는 역할을 해야 함을 안내합니다.


첫 번째 퀘스트에서 NPC 아가타는 플레이어에게 "가고 싶은 곳으로 떠날 것인지, 어둠의 여왕을 섬길 것인지 선택하라"고 언급하는데, 이때 어둠의 여왕을 섬긴다는 것은 인트로 영상에서 언급했던 포세이큰의 일원으로써 역할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후 진행되는 티리스팔 숲 퀘스트에서 플레이어는 포세이큰의 일원으로써 종족에 위협이 되는 적을 처치하거나 그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한 연금술 재료를 모으는 등, 포세이큰의 생존을 위한 다양한 퀘스트를 수행합니다. 플레이어에게 자신이 무슨 역할을 맡게 되었는지 안내해주고,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퀘스트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죠.

이처럼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RPG에서 중요한 것은 역할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플레이어가 맡을 역할을 최대한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리니지2 레볼루션 포스트모템
개발 당시 RPG에 익숙하지 않은 플레이어를 대상으로 했던 테스트가 있었습니다. 이때 가장 많은 피드백이 발생했으며, 개발팀에서도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게임을 시작했으나,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당시 개발팀으로는 기능적인 가이드가 부족하다고 결론을 내렸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퀘스트를 강제로 진행하게 하고, 퀘스트를 따라가기만 하면 게임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을 택했으며, 모두가 그것에 만족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 개발팀 인원 대부분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잊혀 버린 중요한 피드백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내가 퀘스트를 왜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뭘 위해 하는 것인가?"

이미 첫 시작인 이 부분부터 무엇을 왜 해야 하는지가 안내되지 않습니다.
개발팀에서 내린 결정은 그걸 알기 전에 일단 진행시키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한창 즐기고 있었던 엘더스크롤 시리즈를 떠올리면서, 리니지2 레볼루션은 플레이어에게 그들이 맡을 역할에 대해 명확히 안내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아덴 세계를 자유롭게 탐험할 것인지, 이름난 혈맹의 일원이 될지 선택하라는 식의 플레이 경험을 넣자고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개발팀 대부분은 기능 방면으로만 접근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것은 뭘 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을 할 것이 없다 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다는 것으로 잘못 이해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재 리니지2 레볼루션에서는 아덴을 제패할 혈맹의 일원이 되라고 말하는 부분이 거의 없습니다. 비록 이 게임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다고는 하지만, 저는 제가 개발한 것에도 불구하고, 이 성공이 주 타겟층이 원작 IP가 제시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기반한 것으로 판단합니다. 역할을 이해하지 못한 플레이어 대부분은 역할을 맡는지,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하는지, 어떤 배경의 역할극을 하고 있는지 모른 채 올라가는 수치만 보고 재미를 느끼다가 떠나갑니다. 만약 역할 없이 수치적 성장만 있는 게임이라면 그것을 RPG(Role Playing Game)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며, 아름다운 비주얼을 가진 성장 시뮬레이션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만약 다시 만들 기회가 있다면 리니지 2 레볼루션의 컨텐츠를 이렇게 구성할 것입니다.

ㆍ인트로 영상을 어둠의 결사의 야망을 저지하기 위해 연합한 혈맹들로 풀어냅니다.

ㆍ초반에 게임의 핵심 역할과 자유로운 모험 중 선택권이 있다는 안내를 합니다.

ㆍ시나리오 퀘스트는 소속 없는 용병으로 시작하여 크고 작은 혈맹들을 만나 혈맹의 중요성, 개념을 이해하도록 구성합니다. 그후 혈맹 간의 갈등, 영토를 놓고 벌이는 분쟁에 대해 초점에 맞춥니다.

ㆍ퀘스트와 연결되어 있는 컨텐츠는 주민이 혈맹에 의뢰하는 형태로 구성합니다.

이렇게 구성한다면 RPG를 처음 접하는 플레이어는 무엇을 왜 해야 하는지 알게 될 것이며, RPG는 알지만 리니지를 처음 접하는 이들은 게임에서 궁극적으로 노려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아덴 세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빨리 확립하여 몰입도가 높아질 것입니다.


5. 2편을 마무리하며,
플레이어에게 "현재 플레이 하시는 RPG에서, 자신이 어떤 역할을 맡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할까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 "전 호드(얼라이언스)의 일원으로써 타진영을 쳐부숩니다!"
블레이드 앤 소울 : "홍문파 막내로써 복수를 위해 떠나고 있죠."
위쳐3 : "위쳐로써 괴물들을 잡고 다니죠."
엘더스크롤5 스카이림 : "도바킨으로써 용잡으러 다닙니다."

그렇다면 리니지2 레볼루션의 플레이어들은 뭐라고 대답할까요? 개발자들이 원하는 대답은 아마 이것입니다.

"혈맹의 일원으로써, 아덴을 휘어잡을 사람입니다."

하지만 현재 이 게임이 리니지 IP를 처음 접하는 플레이어도 이 대답을 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을까요? 우리가 개발하는 다른 게임들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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