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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하기 전에
게임을 기획하다 보면 쉽게 만나는 상황 중 하나가 바로, 요소가 끝없이 붙는 현상인 피쳐 크리프(Feature Creep)입니다. 그런데 철학을 공부하면서 오컴의 면도날(Occam's Razer)이라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것이 정확히 피쳐 크리프를 겨냥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모든 기획자가 이것을 명심하면 매우 유용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글로 정리해보았습니다.
2. 피쳐 크리프(Feature Creep)와 피쳐 퍼티그(Feature Fatigue)
피쳐 크리프는 기능이 끝없이 붙는 현상을 이야기하는데, 특히 마케팅에서는, 고객 대부분이 전자제품은 기능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여, 자꾸 불필요한 기능을 추가하는 것을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피쳐 크리프 현상이 심해지면 이것과 짝을 이루는 또 하나의 현상, 피쳐 퍼티그가 나타납니다. 기능 혐오라고도 하는 이 현상은, 제품의 기능이 너무 많아서 사용자가 혼란함을 느낀 나머지, 그런 제품에 혐오를 느껴 사용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핸드폰을 예를 들면, 종종 IOS 사용자들이 AOS에 무수히 깔린 기본 앱들을 지적하면서, 다시는 그것을 못 쓸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이런 일은 왜 생길까요? 제 경험상에 비추어 이유를 세 가지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다다익선의 함정에 빠져 많은 것이 좋은 것으로 생각하여 끊임없이 넣는 경우입니다. 두 번째는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처럼, 의견 제시자가 너무 많아져 계속 덧붙여지는 경우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문제 해결을 위해 새것을 추가하는 것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경우입니다.
3. 오컴의 면도날(Occam's Razers)
윌리엄 오컴이라는 중세 유럽 철학가는, 어떤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불필요한 가정을 덧붙여야 한다면 그것은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습니다. 유튜브 채널 5분 뚝딱 철학에서 이해하기 쉬운 예시를 두 가지 들었는데,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어떤 학생이 지각했는데, 선생님이 이유를 묻자 "지하철 놓치고, 버스를 놓치고, 할머니를 돕느라"라며 학생의 말이 길어지기 시작합니다. 이 경우 거짓말일 확률이 높습니다. 이번엔 또 다른 학생이 지각한 이유를 "늦잠을 잤는데요"라고 말합니다. 이 경우는 건방져 보이더라도 진실일 확률이 높습니다.
다소 터무니없어 보일 수 있으니, 조금 더 설득력 있는 두 번째 예시를 한번 보겠습니다. 바로 천동설과 지동설입니다. 아래 이미지는 두 이론을 기반으로 태양계 천체들의 움직임을 도식화한 것입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지동설이 더 깔끔한 형태를 보입니다. 천동설은 때에 따라 변하는 천체들의 모양이나 밝기를 설명하기 위해, 내전원이라는 새로운 가정을 더 했다고 하는데, 지동설은 그럴 필요 없이 공전, 자전 운동만으로 설명됩니다. 또한 다른 은하나 태양계에 관해서도 설명할 수가 있죠. 그리고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이 지동설이 진실입니다.
이처럼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불필요한 가정을 계속 덧붙여야 한다면, 그것은 거짓일 확률이 높으니, 그것을 면도날로 도려내라는 것이 이 철학이 말하는 바입니다.
4. 피쳐 크리프 탈출하기
이 철학을 어떻게 하면 게임 기획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앞서 2번 항목에서 살펴보았던 원인을 가지고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다익선의 함정과 사공이 많아서 발생하는 경우를 살펴보면, 대부분 방향을 명확히 설정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기획할 때는 가장 먼저 방향성(목적, 의도)을 정하고 거기서부터 살을 붙여 나가야 합니다. 만약 이정표가 되는 방향성이 없다면, 살을 붙이는 과정에서 이것저것도 모두 괜찮아 보여서 기능을 마구 추가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최근 나오는 맥가이버칼 대부분이 사용할 일이 거의 없는 것이 다수 추가되어 있는데, 아마도 제작자가 "이왕이면 이것저것 같이 있으면 한 번에 해결하고 좋잖아?" 라는 식으로 추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다 보면 두께가 점점 두꺼워져서 들고 다니기 불편해지고, 결국에는 간편 휴대라는 맥가이버 칼의 방향(가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회의할 때에도 유사한 일이 벌어집니다. 참여한 모든 사람이 저마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좋아하는 것을 마구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이때, 담당 기획자가 기획의 방향성을 꽉 잡고 있지 않으면, 의견 하나하나를 다 반영하려다가 피쳐 크리프를 만들게 됩니다.
이러한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기획자가 자신의 기획에 관한 명확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기획을 세부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결정권자와 협의하여 방향의 못을 박아놓고, 주변에서 어떤 의견이 들어와도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부 기획이나 회의를 진행할 때, 그곳에 매몰되어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수시로 방향성과 현재 상황을 비교해야 합니다.
원인 중 세 번째로 이야기했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경우는, "이걸 해결하려면 이게 또 필요하겠네. 어, 이 문제가 있으니 또 이게 필요하겠네" 식으로 피쳐 크리프가 발생합니다.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함정에 빠지는 것이죠. 사람은 대부분 덜어내는 것보다는 추가하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빠져나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이런 흐름이 계속되면 기획자가 자신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만들어 내고, 결국에는 그것을 정리하는 것에만 급급해집니다.
이때 오컴의 면도날이 필요합니다. 이 철학에 의하면, 계속 뭔가를 덧붙여야 하는 상황인 경우, 이미 잘못된 길로 들어섰을 확률이 높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상황을 만났을 때, 우리는 새로운 것을 추가하는 것보다 도려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이미 덩치가 커져 버린 기획안을 처리할 때에도, 불필요한 것을 찾아 제거하는 것을 먼저 떠올려야 할 것입니다.
5. 게임 기획에 적용하기
이제 마지막으로 실제 게임에선 오컴의 면도날을 어떻게 적용하면 좋을지 예시를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시나리오입니다. 보통 시나리오가 재미없거나 쳐진다는 말이 나오면, 연출이 많고 극적인 사건이나 인물을 추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것 대부분이 서사의 방향성을 고려하지 않고 추가되곤 하는데, 그러다 보면 서사가 갈수록 난잡해집니다. 연관성이 없는 사건이나 어떤 역할이 없는 인물이 보는 사람을 혼란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이럴 때 서사의 방향성을 점검한 후, 오컴의 면도날을 사용하여 서사적 일관성이 없는 사건이나 역할이 없는 인물을 과감히 제거해야 합니다. 좋은 서사는 인물과 사건이 서사를 위해 꼭 필요한 도구가 되어 낭비되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말입니다.
다음은 레벨입니다. 레벨 기획자 역시 시나리오 기획자처럼 지루하다 생각되는 곳에 끊임없이 높이 변화, 갈림길, 적 개체 등을 배치하기 마련합니다. 그러다 보면 모든 곳이 온갖 요소로 가득해집니다. 지형이 쉴 새 없이 오르내리고 갈림길이 연속되어 플레이어가 쉽게 길을 잃는가 하면, 비슷한 패턴의 적이 틈만 나면 등장해 피로감을 크게 상승시키면서, 전투도 지루해집니다. 레벨을 만들 때는 흥미 곡선을 항상 떠올려야 합니다. 모든 곳을 가득 채울 생각을 하지 말고, 굴곡을 준다는 생각으로 힘을 빼야 하는 곳은 확실히 빼야 합니다. 파도가 아름다운 이유는 밀려올 때도 있지만 빠질 때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시스템입니다. 이 경우는 문제를 수정하기 위한 것보다는 사공이 많아서 생기는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제 경험상 이로 인해 피쳐 크리프가 발생하는 경우가 더 많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기획 회의 시, 회의 참여자들은 기획에서 자신이 재미있게 했던 게임의 시스템과 조금이라도 유사한 것을 발견하면, 그것을 의견으로 제시합니다. 여기서 정말 큰 문제는 그 의견이 실제로 재미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기획자가 명확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것을 반영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시스템이 난잡해집니다. 따라서 기획자는 설령 실제로 재미있는 의견이 제시되더라도, 그것이 방향성과 일치하지 않으면 과감히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아마 이 부분에서 의문이 생기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추측하건대 "실제로 재미있었던 것이면 반영해도 되지 않나요?"라는 의문이지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패스 오브 엑자일(Path of Exile)이라는 게임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이 게임은 가장 효율 좋은 조합을 찾아내는 게 핵심 재미인 젬(보석) 시스템이 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회의를 거쳤더니 다음과 같은 의견이 제시되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남은 젬을 도감에 넣어서 능력치를 주면 좋지 않을까요?"
멋진 의견처럼 보입니다! 쓰지 않는 젬을 처리하면서 능력치도 얻을 수 있고, 가방 공간의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효율 조합 방향성과도 잘 어울릴까요? 이것이 핵심 재미라면 정답을 너무 쉽게 얻어선 성취감이 없기 때문에 선택지를 많이 제공해야 합니다. 또한 젬을 쉽게 얻을 수 있고, 많이 가지고 있어야 다양한 조합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이제 도감을 이 방향성과 비교해볼 텐데, 모든 부분에 관해 언급하면 글이 너무 길어지므로 세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젬의 개수 문제입니다. 선택지를 많이 제공한다는 것은, 도감에 넣는 젬 역시 많아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물론 도감의 모든 항목은 보상이 있어야 합니다. 게임을 오래 서비스하면 갈수록 개수는 늘어날 것이며, 도감에 항목 역시 계속 늘어날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지급할 보상이 없거나 보상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등, 보상 지급 관련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며, 기존 플레이어와 신규 플레이어 간의 격차도 갈수록 커져 두 플레이어층이 함께 어울리기 어려워집니다.
두 번째는 선택의 기로 문제입니다. 이제 플레이어는 젬을 도감에 넣을 것인지, 나중을 위해 아껴둘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도감에 넣자니 왠지 나중에 쓰게 될 것만 같고, 아껴두자니 도감의 빈칸이 자꾸 거슬립니다.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도감에 넣으면, 나중에 그 젬이 필요한 순간이 왔을 때 후회할 것이며, 유혹을 참더라도 도감을 완성하고 남을 만큼의 젬을 얻을 때까지 끊임없이 유혹에 시달리며 고통받을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좋은 게임 경험은 아니지요!
세 번째는 도감의 너무 좋은 접근성 문제입니다. 앞선 두 번째의 고민을 마주쳤을 때, 대다수의 사람은 도감에 넣는 것을 선택합니다.
※ 도감을 선택하는 이유를 3가지만 들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직관성 : 조합하는 것보다 도감에 넣는 게 쉽습니다.
피드백 : 도감은 즉시 피드백이 오지만, 조합은 언제 쓸만해 질지 알 수 없습니다.
자이가르니크 효과 : 미완성인 것이 있다면, 그것이 끊임없이 신경 쓰이는 심리입니다.
이 경우, 두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첫 번째, 신규 플레이어의 젬 경험이 도감에 너무 치중됩니다. 게임의 주 경험이 젬 조합이 아닌 도감 수집처럼 느껴질 수 있죠. 두 번째는 도감으로 인해 보유한 젬의 숫자와 종류가 적어져 다양한 시도를 많이 해볼 수 없게 됩니다. 그럼 조합이라는 핵심 재미를 느끼기 어려워지겠지요.
6. 마치며
기획할 때 많이 듣는 이야기는 "어려워야 재미있다"라거나 "무언가 부족하니 어느 게임에 무엇을 넣어보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어렵다는 개념을 보통 기능이 많고 적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으며, 다른 게임의 좋았던 점을 반영하는 것은 역시 매우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입니다. 이런 이유로 기획할 때 가장 많이 하는 행동이 바로 새로운 것을 추가하는 일인 듯합니다.
하지만 유명 게임, 이를테면 다크 소울이나 포켓몬스터는 기능이 많아서 재미있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다크 소울은 복잡한 시스템 없이 단순한 전투 규칙만으로 어렵고 재미있고, 포켓몬스터는 몬스터를 잡아 키워서 싸운다는 규칙만으로도 콘텐츠가 재미있고 깊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게임을 기획할 때, 무언가를 추가하기보다는 단순, 담백하면서도 재미있는 것을 만들 방법이 없는지 먼저 고민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게임을 기획하다 보면 쉽게 만나는 상황 중 하나가 바로, 요소가 끝없이 붙는 현상인 피쳐 크리프(Feature Creep)입니다. 그런데 철학을 공부하면서 오컴의 면도날(Occam's Razer)이라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것이 정확히 피쳐 크리프를 겨냥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모든 기획자가 이것을 명심하면 매우 유용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글로 정리해보았습니다.
피쳐 크리프를 잘 나타내는 일러스트
2. 피쳐 크리프(Feature Creep)와 피쳐 퍼티그(Feature Fatigue)
피쳐 크리프는 기능이 끝없이 붙는 현상을 이야기하는데, 특히 마케팅에서는, 고객 대부분이 전자제품은 기능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여, 자꾸 불필요한 기능을 추가하는 것을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피쳐 크리프 현상이 심해지면 이것과 짝을 이루는 또 하나의 현상, 피쳐 퍼티그가 나타납니다. 기능 혐오라고도 하는 이 현상은, 제품의 기능이 너무 많아서 사용자가 혼란함을 느낀 나머지, 그런 제품에 혐오를 느껴 사용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핸드폰을 예를 들면, 종종 IOS 사용자들이 AOS에 무수히 깔린 기본 앱들을 지적하면서, 다시는 그것을 못 쓸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이런 일은 왜 생길까요? 제 경험상에 비추어 이유를 세 가지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다다익선의 함정에 빠져 많은 것이 좋은 것으로 생각하여 끊임없이 넣는 경우입니다. 두 번째는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처럼, 의견 제시자가 너무 많아져 계속 덧붙여지는 경우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문제 해결을 위해 새것을 추가하는 것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경우입니다.
MS워드의 무수한 기능. 과연 이것들이 모두 사용되기는 하는 것일까요?
3. 오컴의 면도날(Occam's Razers)
윌리엄 오컴이라는 중세 유럽 철학가는, 어떤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불필요한 가정을 덧붙여야 한다면 그것은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습니다. 유튜브 채널 5분 뚝딱 철학에서 이해하기 쉬운 예시를 두 가지 들었는데,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어떤 학생이 지각했는데, 선생님이 이유를 묻자 "지하철 놓치고, 버스를 놓치고, 할머니를 돕느라"라며 학생의 말이 길어지기 시작합니다. 이 경우 거짓말일 확률이 높습니다. 이번엔 또 다른 학생이 지각한 이유를 "늦잠을 잤는데요"라고 말합니다. 이 경우는 건방져 보이더라도 진실일 확률이 높습니다.
다소 터무니없어 보일 수 있으니, 조금 더 설득력 있는 두 번째 예시를 한번 보겠습니다. 바로 천동설과 지동설입니다. 아래 이미지는 두 이론을 기반으로 태양계 천체들의 움직임을 도식화한 것입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지동설이 더 깔끔한 형태를 보입니다. 천동설은 때에 따라 변하는 천체들의 모양이나 밝기를 설명하기 위해, 내전원이라는 새로운 가정을 더 했다고 하는데, 지동설은 그럴 필요 없이 공전, 자전 운동만으로 설명됩니다. 또한 다른 은하나 태양계에 관해서도 설명할 수가 있죠. 그리고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이 지동설이 진실입니다.
이처럼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불필요한 가정을 계속 덧붙여야 한다면, 그것은 거짓일 확률이 높으니, 그것을 면도날로 도려내라는 것이 이 철학이 말하는 바입니다.
지동설(좌)과 천동설(우)을 표현한 그림
4. 피쳐 크리프 탈출하기
이 철학을 어떻게 하면 게임 기획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앞서 2번 항목에서 살펴보았던 원인을 가지고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다익선의 함정과 사공이 많아서 발생하는 경우를 살펴보면, 대부분 방향을 명확히 설정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기획할 때는 가장 먼저 방향성(목적, 의도)을 정하고 거기서부터 살을 붙여 나가야 합니다. 만약 이정표가 되는 방향성이 없다면, 살을 붙이는 과정에서 이것저것도 모두 괜찮아 보여서 기능을 마구 추가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최근 나오는 맥가이버칼 대부분이 사용할 일이 거의 없는 것이 다수 추가되어 있는데, 아마도 제작자가 "이왕이면 이것저것 같이 있으면 한 번에 해결하고 좋잖아?" 라는 식으로 추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다 보면 두께가 점점 두꺼워져서 들고 다니기 불편해지고, 결국에는 간편 휴대라는 맥가이버 칼의 방향(가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회의할 때에도 유사한 일이 벌어집니다. 참여한 모든 사람이 저마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좋아하는 것을 마구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이때, 담당 기획자가 기획의 방향성을 꽉 잡고 있지 않으면, 의견 하나하나를 다 반영하려다가 피쳐 크리프를 만들게 됩니다.
이러한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기획자가 자신의 기획에 관한 명확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기획을 세부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결정권자와 협의하여 방향의 못을 박아놓고, 주변에서 어떤 의견이 들어와도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부 기획이나 회의를 진행할 때, 그곳에 매몰되어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수시로 방향성과 현재 상황을 비교해야 합니다.
맥가이버칼의 방향성은 무엇일까요?
원인 중 세 번째로 이야기했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경우는, "이걸 해결하려면 이게 또 필요하겠네. 어, 이 문제가 있으니 또 이게 필요하겠네" 식으로 피쳐 크리프가 발생합니다.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함정에 빠지는 것이죠. 사람은 대부분 덜어내는 것보다는 추가하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빠져나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이런 흐름이 계속되면 기획자가 자신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만들어 내고, 결국에는 그것을 정리하는 것에만 급급해집니다.
이때 오컴의 면도날이 필요합니다. 이 철학에 의하면, 계속 뭔가를 덧붙여야 하는 상황인 경우, 이미 잘못된 길로 들어섰을 확률이 높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상황을 만났을 때, 우리는 새로운 것을 추가하는 것보다 도려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이미 덩치가 커져 버린 기획안을 처리할 때에도, 불필요한 것을 찾아 제거하는 것을 먼저 떠올려야 할 것입니다.
문제를 수정하기 위해 새로운 것을 넣다보면 또 새로운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5. 게임 기획에 적용하기
이제 마지막으로 실제 게임에선 오컴의 면도날을 어떻게 적용하면 좋을지 예시를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시나리오입니다. 보통 시나리오가 재미없거나 쳐진다는 말이 나오면, 연출이 많고 극적인 사건이나 인물을 추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것 대부분이 서사의 방향성을 고려하지 않고 추가되곤 하는데, 그러다 보면 서사가 갈수록 난잡해집니다. 연관성이 없는 사건이나 어떤 역할이 없는 인물이 보는 사람을 혼란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이럴 때 서사의 방향성을 점검한 후, 오컴의 면도날을 사용하여 서사적 일관성이 없는 사건이나 역할이 없는 인물을 과감히 제거해야 합니다. 좋은 서사는 인물과 사건이 서사를 위해 꼭 필요한 도구가 되어 낭비되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말입니다.
다음은 레벨입니다. 레벨 기획자 역시 시나리오 기획자처럼 지루하다 생각되는 곳에 끊임없이 높이 변화, 갈림길, 적 개체 등을 배치하기 마련합니다. 그러다 보면 모든 곳이 온갖 요소로 가득해집니다. 지형이 쉴 새 없이 오르내리고 갈림길이 연속되어 플레이어가 쉽게 길을 잃는가 하면, 비슷한 패턴의 적이 틈만 나면 등장해 피로감을 크게 상승시키면서, 전투도 지루해집니다. 레벨을 만들 때는 흥미 곡선을 항상 떠올려야 합니다. 모든 곳을 가득 채울 생각을 하지 말고, 굴곡을 준다는 생각으로 힘을 빼야 하는 곳은 확실히 빼야 합니다. 파도가 아름다운 이유는 밀려올 때도 있지만 빠질 때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지속적인 흥미를 이끌어 가려면 강약을 조절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시스템입니다. 이 경우는 문제를 수정하기 위한 것보다는 사공이 많아서 생기는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제 경험상 이로 인해 피쳐 크리프가 발생하는 경우가 더 많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기획 회의 시, 회의 참여자들은 기획에서 자신이 재미있게 했던 게임의 시스템과 조금이라도 유사한 것을 발견하면, 그것을 의견으로 제시합니다. 여기서 정말 큰 문제는 그 의견이 실제로 재미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기획자가 명확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것을 반영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시스템이 난잡해집니다. 따라서 기획자는 설령 실제로 재미있는 의견이 제시되더라도, 그것이 방향성과 일치하지 않으면 과감히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아마 이 부분에서 의문이 생기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추측하건대 "실제로 재미있었던 것이면 반영해도 되지 않나요?"라는 의문이지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패스 오브 엑자일(Path of Exile)이라는 게임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이 게임은 가장 효율 좋은 조합을 찾아내는 게 핵심 재미인 젬(보석) 시스템이 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회의를 거쳤더니 다음과 같은 의견이 제시되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남은 젬을 도감에 넣어서 능력치를 주면 좋지 않을까요?"
멋진 의견처럼 보입니다! 쓰지 않는 젬을 처리하면서 능력치도 얻을 수 있고, 가방 공간의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효율 조합 방향성과도 잘 어울릴까요? 이것이 핵심 재미라면 정답을 너무 쉽게 얻어선 성취감이 없기 때문에 선택지를 많이 제공해야 합니다. 또한 젬을 쉽게 얻을 수 있고, 많이 가지고 있어야 다양한 조합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이제 도감을 이 방향성과 비교해볼 텐데, 모든 부분에 관해 언급하면 글이 너무 길어지므로 세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패스 오브 엑자일은 무수히 많은 젬을 다양하게 조합하는 것이 핵심 재미입니다.
첫 번째는 젬의 개수 문제입니다. 선택지를 많이 제공한다는 것은, 도감에 넣는 젬 역시 많아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물론 도감의 모든 항목은 보상이 있어야 합니다. 게임을 오래 서비스하면 갈수록 개수는 늘어날 것이며, 도감에 항목 역시 계속 늘어날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지급할 보상이 없거나 보상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등, 보상 지급 관련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며, 기존 플레이어와 신규 플레이어 간의 격차도 갈수록 커져 두 플레이어층이 함께 어울리기 어려워집니다.
두 번째는 선택의 기로 문제입니다. 이제 플레이어는 젬을 도감에 넣을 것인지, 나중을 위해 아껴둘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도감에 넣자니 왠지 나중에 쓰게 될 것만 같고, 아껴두자니 도감의 빈칸이 자꾸 거슬립니다.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도감에 넣으면, 나중에 그 젬이 필요한 순간이 왔을 때 후회할 것이며, 유혹을 참더라도 도감을 완성하고 남을 만큼의 젬을 얻을 때까지 끊임없이 유혹에 시달리며 고통받을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좋은 게임 경험은 아니지요!
세 번째는 도감의 너무 좋은 접근성 문제입니다. 앞선 두 번째의 고민을 마주쳤을 때, 대다수의 사람은 도감에 넣는 것을 선택합니다.
※ 도감을 선택하는 이유를 3가지만 들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직관성 : 조합하는 것보다 도감에 넣는 게 쉽습니다.
피드백 : 도감은 즉시 피드백이 오지만, 조합은 언제 쓸만해 질지 알 수 없습니다.
자이가르니크 효과 : 미완성인 것이 있다면, 그것이 끊임없이 신경 쓰이는 심리입니다.
이 경우, 두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첫 번째, 신규 플레이어의 젬 경험이 도감에 너무 치중됩니다. 게임의 주 경험이 젬 조합이 아닌 도감 수집처럼 느껴질 수 있죠. 두 번째는 도감으로 인해 보유한 젬의 숫자와 종류가 적어져 다양한 시도를 많이 해볼 수 없게 됩니다. 그럼 조합이라는 핵심 재미를 느끼기 어려워지겠지요.
6. 마치며
기획할 때 많이 듣는 이야기는 "어려워야 재미있다"라거나 "무언가 부족하니 어느 게임에 무엇을 넣어보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어렵다는 개념을 보통 기능이 많고 적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으며, 다른 게임의 좋았던 점을 반영하는 것은 역시 매우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입니다. 이런 이유로 기획할 때 가장 많이 하는 행동이 바로 새로운 것을 추가하는 일인 듯합니다.
하지만 유명 게임, 이를테면 다크 소울이나 포켓몬스터는 기능이 많아서 재미있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다크 소울은 복잡한 시스템 없이 단순한 전투 규칙만으로 어렵고 재미있고, 포켓몬스터는 몬스터를 잡아 키워서 싸운다는 규칙만으로도 콘텐츠가 재미있고 깊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게임을 기획할 때, 무언가를 추가하기보다는 단순, 담백하면서도 재미있는 것을 만들 방법이 없는지 먼저 고민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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